‘대반격’ 본격화?…러 국방부 “우크라 지상군, 러 본토 전격 침공”

‘대반격’ 본격화?…러 국방부 “우크라 지상군, 러 본토 전격 침공”

우크라이나가 국경을 접한 러시아 본토 지역 일부에 침공을 시도했다고 러시아 측이 1일(현지시간)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그동안 예고해 온 ‘대반격’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미국의소리(VOA)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국방부는 남서부 벨고로드주에서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침공 시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탱크를 동원한 기동 보병 중대 등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지상군 부대가 벨고로드 침공을 전격적으로 시도했다”며 “하지만 우리 군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주장했다.또 러시아 국방부는 이번 교전에 관해 “우리 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신성한 영토를 방어했다”며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전투기와 포병 전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러시아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테러리스트 30명 이상이 제거됐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측) 장갑차 4대, 다연장로켓(MLRS) 발사기 1대, 트럭 1대가 파괴됐다”고 덧붙였다. 뱌체슬라프 글라트코프 벨고로드 주지사는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지상군이 진입을 시도하기에 앞서 포격이 이어지면서 건물들이 파괴되고 8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러시아 측의 이 같은 발표에 관해, 우크라이나 당국의 입장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우크라이나 군사·안보 전문 SNS 채널에는 벨고로드 현장 상황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VOA는 전했다. 앞서 지난달 22일 벨고로드에서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였던 러시아 반체제 단체인 ‘자유 러시아 군단(FRL)’과 ‘러시아 의용군 부대(RVC)’도 자체 SNS 채널을 통해 벨고로드 작전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중화기를 이끌고 작전 구역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한편 우크라이나 측은 그동안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대반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한 바 있다. 올렉시 다닐로우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회의 서기는 지난 달 27일 공개된 영국 BBC 방송 인터뷰에서 ‘대반격’에 대해 “내일, 모레 또는 일주일 안에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러시아 본토 곳곳에서 우크라이나 측이 실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드론(무인항공기) 공습과 폭격이 이어졌다.또 지난달 30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도 대규모 드론 공습이 단행됐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스크바 공습을 ‘테러 행위’로 규정하고 이에 관해 강력하게 보복하겠다고 당일 경고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31일) 러시아의 흑해 연안 대형 석유수출 터미널 인근 정유 시설 2곳에 드론 공격이 발생했다고 크라스노다르 주 당국이 발표했다. 같은 날 또 다른 드론이 노보로시스크에서 동쪽으로 65km 떨어진 일스키 정유소 안에 추락했다고 현지 당국자들이 언론에 밝혔다. 일스키 정유소는 이달 초에도 드론 공격을 받아 화재가 났던 곳이다.동시다발적으로 러시아 주요 지역과 시설에서 드론 공습 등이 발생하며 서방 언론들은 우크라이나가 예고해 온 대반격의 일환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박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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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만간 두번째 실험 감행 가능성…다른 발사대, 분주한 움직임”

“북한, 조만간 두번째 실험 감행 가능성…다른 발사대, 분주한 움직임”

북한이 첫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실패한 데 이어 조만간 두 번째 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북한전문매체 NK뉴스는 1일(현지 시간)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지난달 30일 ‘천리마 1호’ 발사는 서해위성발사장 내 새로운 발사대에서 이뤄졌다"며 "기존의 서해위성발사대에서 관측된 움직임의 이유는 (현 상황에서) 설명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NK뉴스는 상업위성 사진을 토대로 "발사를 앞둔 며칠간 기존 발사대 주변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감지됐다"면서 "많은 차량들이 발사대 주변에서 관측됐고 크레인들 역시 배치돼 있었으며, 레일이 장착된 이송 구조물이 발사 타워와 나란히 배치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모든 것들은 과거 발사가 임박한 징후였다"며 "기존 발사대 주변의 이 같은 움직임은 또 다른 발사가 임박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예측했다.이 매체는 "북한의 선박에 대한 항행 경고는 오는 11일 새벽까지 유효하지만, 이 경고가 유효하려면 동일한 유형의 발사가 시도돼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3개의 파편 낙하 구역이 달라진다"고 덧붙였다.NK뉴스는 "만약 약간 다른 발사가 계획돼 있다면, 북한은 새로운 항행 경고를 내릴 수 있다"며 "조선중앙통신은 2단 엔진 문제로 발사가 실패했으며 추가 시험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여기에 서해 발사장을 이용한 엔진 실험이 포함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앞서 북한 우주개발국은 군사정찰위성 ‘만리경 1호’를 신형위성운반로켓 ‘천리마 1호’에 탑재해 발사했지만, 2단 엔진에 문제가 발생해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우주개발국은 "여러가지 부분시험들을 거쳐 가급적으로 빠른 기간 내에 제2차 발사를 단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도 첫 발사 실패 뒤 담화를 통해 "군사정찰위성은 머지않아 우주궤도에 정확히 진입해 임무 수행에 착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곽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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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y

‘성과급 잔치’ 국내은행 ‘이자장사’로 올해 1분기도 ‘역대급’ 순이익…7조원 육박

‘성과급 잔치’ 국내은행 ‘이자장사’로 올해 1분기도 ‘역대급’ 순이익…7조원 육박

‘고액 성과급 지급’으로 논란이 일었던 국내 은행들이 고금리 대출에 따른 이자 장사로, 올해 1분기 역대급인 7조 원에 육박하는 순이익을 낸 것으로 추산됐다.2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일반은행, 지방은행, 특수은행, 인터넷은행을 합친 국내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6조 원 후반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 5조6000억 원보다 1조여 원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금리 상승으로 은행들의 이자 이익이 급증하면서 순이익 증가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올해 1분기 국내은행의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늘어났다"며 "대출이 늘고 금리가 올라갔으니 이자 이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비이자 이익은 금리가 오르면서 채권 평가 손실이 나서 전년 동기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시중은행 가운데선 우리은행의 올해 1분기 순이익이 8595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9% 넘게 늘었고 하나은행이 9742억 원, 신한은행이 9316억 원으로 각각 45.5%, 7.9% 증가했다. KB국민은행도 올해 1분기 순이익이 9219억 원에 달했고 NH농협은행은 전년 동기보다 29.6% 늘어난 4097억 원의 순이익을 냈다. 특수은행인 IBK기업은행은 올해 1분기 순이익 7233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2.8% 늘었다. 지방은행들도 올해 1분기 실적이 대부분 좋았다.문제는 올해 1분기에 은행들이 역대급 실적을 낸 주된 이유가 고금리 대출에 따른 이자 수익이라는 점이다. 신한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은 지난해 당기순이익 12조6908억 원을 거두면서 고정급, 성과급, 퇴직급, 복리후생비 등 인건비에 총 10조7991억 원을 퍼부어 ‘성과급 잔치’라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이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국내은행의 올해 1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로는 급증했지만, 지난해 4분기와 비교하면 이자 이익이 감소했다면서 최근 들어 은행들이 대출 금리를 내린 효과가 차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단, 은행들의 올해 1분기 실적이 역대급으로 나옴에 따라 금융당국은 금융시장 불안 등에 대비해 손실 흡수능력 확충을 통한 자본 건전성 강화와 취약계층에 대한 금융 지원 확대를 통한 상생 금융 확대 등을 더욱 강력히 주문할 것으로 보인다.곽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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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끝모를 전세사기…수도권 100여 채 보유 임대인이 전세금 안주고 잠적

끝모를 전세사기…수도권 100여 채 보유 임대인이 전세금 안주고 잠적

수도권에 오피스텔 등 100여 채를 소유한 임대인으로부터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1일 사기 혐의로 30대 임대인 A 씨를 입건했다고 2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서울·경기·인천 지역에 오피스텔과 다세대주택 등 100여 채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임대차 계약이 만료됐는데도 임차인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잠적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경찰에 확인된 피해자는 6명으로, 이들의 피해 금액은 약 6억5000만 원으로 파악됐다. 피해자들은 A 씨가 보유한 오피스텔과 다세대주택 등에 대해 1억 원 안팎의 임대차 계약을 맺은 것으로 전해졌다.국토교통부는 앞서 피해자 5명으로부터 A 씨와 관련한 보증금 미반환 상담을 접수하고, 지난달 11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수사 의뢰했다. 이후 나머지 피해자 1명이 경찰에 추가로 피해 사실을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국토부는 A 씨가 임차인이 지불한 임대차 보증금으로 다른 주택을 매입하는 계약을 동시에 진행,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주택 소유권을 취득하는 ‘무자본 갭투자’를 해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A 씨가 주택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만큼 추후 피해 규모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경찰은 잠적한 A 씨의 소재를 추적하는 한편, 정확한 피해 규모와 사건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노기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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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주머니에 발 걸린 바이든 ‘꽈당’…넘어질 때마다 경호원들도 ‘철렁’

모래주머니에 발 걸린 바이든 ‘꽈당’…넘어질 때마다 경호원들도 ‘철렁’

미국 역사상 최고령 현역 대통령인 조 바이든(80)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또다시 넘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경호원 등 보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의 미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 행사에서 연설 후 생도들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자리로 돌아가다 모래주머니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바이든이 쓰러진 직후 비밀경호국(SS) 소속 경호관들과 사관학교 관계자들도 깜짝 놀라며 대통령 쪽으로 뛰쳐 나갔고, 바이든 대통령은 3명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주위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든 대통령은 별다른 문제 없이 혼자서 걸어 자리로 돌아갔다. 다만 도중에 뒤돌아서 무대 주변에 있는 검은 모래주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래주머니 때문에 넘어졌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이날 해프닝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별다른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공보국장 벤 라볼트는 행사 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은 괜찮다"며 "무대 위에 모래주머니가 있었다"고 전했다.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고령인 만큼 취임 후 이처럼 넘어지는 일이 생길 때마다 건강에 대한 우려를 일으켰다. 지난해 6월에는 개인 별장이 있는 델라웨어주 레호보스 비치 인근의 케이프 헨로펀 주립공원에서 자전거에 오르다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당시에도 경호관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지만, 별다른 부상 없이 곧바로 시민 및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난 2021년 3월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기 위해 계단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 바 있다. 또 대선 후 당선인 신분이던 2020년 11월에는 반려견 ‘메이저’와 놀아주다 미끄러져 오른쪽 발목에 실금이 갔고, 한동안 절뚝이며 걸어야 했다.박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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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가리에 쌓인 50m 높이 모래언덕… 유배·표류의 아픔까지 보듬어준 섬

소대가리에 쌓인 50m 높이 모래언덕… 유배·표류의 아픔까지 보듬어준 섬

우이도(신안) = 글 · 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돈목마을 이장은 시비를 바꿀까섬사람들은 ‘없다’는 말에 민감하다. 섬에는 진짜 없는 것이 많아서다. 우이도 성촌(星村)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마을 선착장 앞의 시비(詩碑)가 못마땅하다. 시비 앞에서 한 주민(주민이래 봐야 여섯 가구에 주민 열둘이 고작이지만)은 ‘대놓고 무시하는 수작이 아니면 뭐냐’고까지 했다. 시비에 새겨진 시 제목은 ‘우이도 성촌마을’. 평생 바다와 섬을 떠돌며 시를 써서 ‘섬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생진 시인의 시다.“성촌마을은/ 돈목마을보다 더 야위었다./ 교회도 없고 폐교도 없다/ 나는 불쑥 외로움을 자랑한다/ 성촌 백사장은 그만큼 혼자/ 외치는 소리가 많다/ 떠내려온 수심(愁心)도 많다/ …(중략)…/ 막걸리 생각이 나는데/ 이 마을엔 막걸리가 없다/ 오 그렇지/ 바다 막걸리/ 바다 막걸리 한 잔/ 나는 그것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 이생진 ‘성촌마을’ 중에서.시는 여위고 작은 섬의 모습을 쓸쓸하게 그렸다. 그런데 시에서 성촌마을에 자꾸 뭐가 ‘없다’고 하니 주민들이 뿔이 났다. “작고 소박한 것이 귀하다는 칭찬의 말”이라고 했더니 뒷짐 지고선 헛기침을 하던 주민 몇몇의 말씀. “칭찬이라면 다 존(좋은) 말로 하는 것이제….” “고렇게 막걸리 자시고(드시고) 싶었으믄 달라 하시든가.”성촌마을 주민이 언짢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다. 성촌마을은 마주 보고 있는 돈목마을보다 야위었고 쓸쓸하다. 돈목마을 주민 수가 성촌마을의 두 배가 넘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열세 가구에 주민 스물세 명’이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우이도란 섬 이름은 소(牛·우)의 귀(耳·이)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지도를 보고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영락없이 소 대가리의 모습이다. 소귀 중 하나가 성촌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돈목마을이다. 마을은 나뉘어 있지만 두 마을은 가운데 백사장을 두고 서로 빤히 마주 보고 있다. 거리만 가까운 게 아니라 마을 이장까지 공유한다. 돈목마을 이장이 성촌마을 살림까지 함께 본다. 두 마을은 늘 비교된다. 섬에서는 큰 마을이 작은 마을의 눈치를 본다. ‘소외의 심경’을 알아서다. 박흥영(59) 이장이 목소리 작은 성촌마을 주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안군에다 성촌마을 시비를 바꿔달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박 이장의 고심이 깊다.# 우이도 모래사구는 ‘위’에서 보자우이도의 성촌마을과 돈목마을, 두 마을을 합쳐서 ‘우이2구’라고 부른다. 누군가 ‘우이도에 간다’고 하면 십중팔구 여기 ‘우이2구’다. 우이도의 명물은 단연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산처럼 쌓인 ‘우이 사구(沙丘)’다. 그 모래언덕이 바로 돈목마을과 성촌마을 사이에 있다. 우이도에 간다는 건, 사구를 보러 간다는 것. 그러니 우이도에서는 우이2구, 그중에서도 좀 더 크고 민박이 많은 돈목마을이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이쯤에서 의문 하나. 왜 거기가 ‘우이1구’가 아니라 ‘우이2구’일까.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우이2구가 섬의 서쪽이어서다. 섬에 가면 무조건 육지와 가까운 쪽에다 앞선 순번을 매긴다. 예외는 없다. 섬의 동쪽에 있는 진리마을이 육지와 가까우니 우이1구이고, 섬의 서쪽이 우이2구다. 2구가 소의 귀였다면, 우이1구는 소 입의 자리다. 두 번째 설명은 진리마을이 먼저 생겨나서다. 진리는 본래 파도의 영향을 덜 받는 협만 안쪽에 있어 돈목보다 마을이 먼저 형성됐다. 그래서 순서대로 진리마을이 예리마을과 합쳐 우이1구가 됐고, 뒤늦게 마을이 들어선 돈목마을과 성촌마을이 우이2구가 됐다는 얘기다.이제 우이도를 둘러보자. 먼저 가는 곳은 우이도의 명물인 사구. 해안가의 거대한 모래언덕을 ‘우이도 사구’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풍성(風成) 사구’라고 부른다. ‘바람 풍(風)’에 ‘이룰 성(成)’, 그러니까 ‘바람으로 만들어진 모래언덕’이라는 얘기다. 만들어진 연유를 이름에 담았다. 모래언덕은 파도와 바람의 합작품. 파도가 백사장으로 밀어 올린 모래를 바람이 끌고 올라가 사막 같은 언덕이 만들어졌다.모래언덕은 사실 ‘아래’에서 바라보면 그다지 볼품이 없다. 첫인상은 ‘정수리가 벗겨진 대머리’쯤이다. 터진 모래 포대에서 모래가 쏟아진 것 같은 모습이 이색적이긴 해도 ‘뭐 저런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이냐’ 싶다. 그런데 ‘위’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풍성 사구는 모래언덕 위에 올라서 봐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풍경인지 알 수 있다.오랫동안 훼손 우려 때문에 모래언덕을 오를 수 없었는데, 이제 사구 옆 작은 오솔길로 모래언덕에 올라 사구 정상에 설 수 있게 됐다. 거기 서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비슷한 곳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독창적으로 아름답다. 우이도까지 먼 뱃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추억의 흑백사진 같은 섬마을 풍경풍성 사구 모래언덕의 높이는 50m쯤. 그 정도의 높이만으로도 사구의 느낌은 달라진다. 사구 위에 오르면 거대한 모래 더미의 규모가 비로소 실감 난다. 언덕 위는 사막과 비슷하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모래 표면에 새긴 무늬가 선명하다. 돈목마을 박 이장은 “여름과 겨울, 바람의 방향이 달라서 모래언덕은 여름에는 북쪽이, 겨울에는 남쪽이 급경사를 이룬다”고 했다. 급경사의 모래언덕 아래로 너른 백사장과 바다가, 그리고 그 너머로 돈목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언덕에서 나란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던 박 이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정말 근사하지요.”돈목마을에서 나고 자란 박 이장은 서울에서 횟집 주방장 일을 했다. 육지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군 제대 후 회칼을 잡았다. 친구 따라간 고급 횟집 주방장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란다. 서울 강남의 최고급 횟집에서 20년 넘게 회를 떴다. 박 이장은 긴 객지 생활에서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늘 이 모래언덕을 떠올렸다고 했다. 고향 우이도를 떠올리는 추억의 중심에는 모래언덕이 있었다.“여름이면 종일 백사장에 나가 살았어요. 헤엄도 치고, 조개도 잡고, 축구도 하고…. 모래언덕에 올라가 모래 미끄럼을 타며 놀았지요.”풍성 사구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최우선 보호지역. 지금은 훼손 우려로 모래언덕 옆으로 난 오솔길로만 오를 수 있는데, 그때는 모래언덕을 밟고 곧바로 오를 수 있었다. 그때 모래언덕은 지금보다 30m 이상 높았다. 변변한 운동장 하나 없는 섬의 작은 마을 아이들에게는 이만한 놀이터가 없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던 박 이장은 “그때 돈목마을 분교 전교생이 55명이었다”고 했다. 돈목마을 전체가 35가구이던 시절, 초등학생만 55명이라니…. 그때는 한 집에 아이 네댓쯤은 기본이었고, 보통 예닐곱까지 됐다고 했다.돈목해변에서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백사장을 굴러다녔다던 오래전의 우이도 풍경을 상상했다.섬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여행자도 돈목의 바다에서 느끼게 되는 건 고향의 정서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바다와 모래뿐인 작은 섬마을이, 마치 시간을 박제해 놓은 흑백사진 속 풍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래언덕을 보호해야 하는 까닭섬마을 아이들이 조개를 잡던 우이도의 조용한 해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우이도 풍성 사구의 이국적 풍경이 신문과 TV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손바닥만 한 섬마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무렵 우이도를 찾은 외지인이 한 해 4000명이 넘었다. 지금은 하루 한 번 우이도를 오가는 여객선 ‘섬사랑 6호’가 특별운항편을 운용해 하루 세 번 우이도를 오갔을 정도였다. 그 무렵 돈목마을 주민들은 민박을 치고 밥을 차려주며 적잖은 수입을 올렸다. 귀한 줄 몰랐던 우이도 모래언덕이 가져다준 변화였다.그 무렵 폭증한 관광객들이 모래언덕을 마구 오르내린 탓에 사구가 크게 훼손됐다. 하루가 다르게 낮아져 가는 모래언덕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다도해 국립공원사무소가 급기야 ‘사구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관광객이 격감하자 주민들이 반발했다. 환경보호 조치에 맞서는 관광지의 대표적 논리 ‘사람 먼저 살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국립공원공단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랜 대치가 이어지면서 주민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박 이장의 설명. “사실 사구가 훼손돼 가는 걸 주민들이 가장 가까이서 봤거든요.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보고 모래언덕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았고요. 당장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이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 ‘사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이런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 덕에 풍성 사구는 점차 복원돼 가고 있다. 이만큼 되돌리는 데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새로 놓은 우회로를 따라 풍성 사구에 오를 수 있게 된 건, 모두의 이런 노고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각별히 유의하자. 금지된 공간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말 것이며, 모래를 무너뜨리거나 지형을 조금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역대급’ 표류자, 우이도의 홍어 장수이제 우이1구로 건너가 보자. 우이2구가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면, 우이1구의 진리마을에는 ‘사람’과 ‘이야기’가 있다. 우이도의 과거 지명은 ‘소흑산도’였다. 지금의 흑산도는 대흑산도라고 불렸다.우이도의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전이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도, 우이도에서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우이도에서 세상을 떴다. 우이도에는 정약전이 살았던 집터와 서당 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진리마을에서 근래 정약전보다 더 조명받는 인물이 있다. ‘홍어 장수 문순득’이다.우이도 진리마을은 섬마을인데도 특이하게 상업적 전통이 강하다. 조류와 바람을 이용해 바다를 항해하던 시절 우이도는 일대 섬 교역의 중심이었다. 문순득의 증조부 문일장이 우이도에 정착했던 것도 이런 입지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우이도 주민들은 고기잡이나 농사보다는 섬과 섬, 혹은 섬과 육지를 오가며 장사와 교역으로 생계를 이었다.조선 순조 때 우이도 사람 문순득도 마찬가지였다.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 지금의 흑산도 아래 태사도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1801년 12월의 일이다. 처음 표류한 곳은 일본 오키나와(沖繩). 거기서 우여곡절 끝에 중국 상선 편으로 중국을 거쳐 귀국하려 했는데, 중국행 상선이 또다시 표류하는 바람에 필리핀 루손섬까지 떠내려가고 말았다. 거기서 중국 광저우(廣州)와 마카오(澳門), 베이징(北京)을 거쳐 조선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천신만고로 고향 우이도로 돌아온 게 1805년 1월 8일의 일이다. 3년 2개월. 우리 해양 역사상 가장 긴 거리, 긴 시간을 표류한 기록이다.문순득의 이른바 ‘역대급’ 표류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릴 만큼 세상에 알려진 건, 우이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문순득의 진술을 바탕으로 쓴 책 ‘표해시말’ 덕분이다. 문순득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기억력이 비상하고 놀라울 정도로 명민했던 모양이다. 표해시말에는 필리핀에서 목격한 화폐 유통부터 럼주를 마시고, 투계를 구경하는 따위의 얘기가 촘촘하다. 놀라운 건 표해시말 말미에는 112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뒤 오키나와 언어와 필리핀어로 적어 놓은 것. 오키나와와 루손섬에서 각각 8개월 남짓 머무는 동안 문순득이 그 나라 말을 배워왔다는 얘기다.진리마을에서는 당대의 유배객보다 파란만장한 표류를 경험한 홍어 장수가 더 대접받고 있는 듯하다. 우이도에 도착하면 먼저 발을 딛는 진리선착장에 문순득 동상이 있고, 그 뒤 포구 안쪽에 정약전 동상이 있으며, 문순득 생가는 말끔하게 복원돼 있는데, 정약전 유배지는 마늘밭을 일구느라 허물어버린 자리에 말뚝 하나만 세워져 있다.# 섬마을 언덕의 순정한 풍경진리마을에도 근사한 경관이 있다. 우이도에는 큰 모래해변이 세 개 있는데, 그중 두 개가 우이2구인 돈목마을과 성촌마을에, 나머지 하나가 진리마을 쪽에 있다. 진리마을 해변이 띠밭너머해변이다. 마을 뒤쪽에 띠밭너머해변으로 이어지는 작은 초지 언덕이 있는데, 언덕 위에는 빨간색 벤치를 놓아두었다. 벤치에 앉으면 접시 모양 지형의 푸른 초지 아래로 백사장과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진다. 어찌 보면 좀 밋밋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보면 볼수록 더 마음이 끌린다. ‘저자극의 순정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굳이 치장하지 않은 담박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우이1구와 우이2구 마을은 섬의 동서 양쪽 끝단에 있다. 우이도에는 선착장 주변 말고는 차도가 없다. 1구와 2구의 마을을 모두 다 보겠다면 순전히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섬 한복판에 1구와 2구를 잇는 길이 있다. 거리는 2㎞ 남짓.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짙은 숲이 초록의 터널을 이루는 길이다. 서어나무와 동백나무를 비롯한 난대림, 그리고 울창한 대나무까지 길 위의 숲이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우이1구에서 2구 사이에는 진리고개와 대초리고개 두 개의 고개가 있다. 적당한 오르막의 긴장이 곁들여져 트레킹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다. 진리에서 가자면 두 번째 고개인 대초리고개 아래에는 대숲 속에 파묻힌 대초리마을이 있다. 우이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다는 마을인데, 대나무 뿌리가 슬금슬금 집 안까지 들어와서 아예 집을 다 허물어버린 곳이다. 그 길에서는 하늘을 찌를 듯 자란 대나무가, 돌담만 남기고 마을의 집들을 다 먹어치운 모습을 볼 수 있다.진리고개는 삼거리다. 두 길은 우이1·2구로 가는 길이고 나머지 하나의 길이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상산봉(해발 361m)으로 이어진다. 상산봉은 오름길에서 보면 부드러운 흙산처럼 보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수직의 암릉이다. 정상의 시야는 거칠 것 없이 사방으로 트였다. 비금도와 도초도, 하의도와 상태도, 하태도까지…. 신안 앞바다 섬들이 죄다 내려다보인다. 내륙의 산에서는 흔히 ‘구름이 바다처럼 보인다’고 말하는데, 여기 상산봉에서는 바다가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 작은 섬을 여행하는 재미이제 좀 개인적인 이야기다. 17년 전에 우이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우이도 돈목마을의 어부 박화진(74) 씨 집에서 민박을 했는데 박 씨의 제안으로 함께 선외기 어선을 타고 정치망을 건지러 갔다. 정치망이란 어항처럼 고정 그물을 놔두고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그물. 배를 타고 나가 건져낸 정치망 안에는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펄떡거렸다. 농어, 도다리, 감성돔…. 모두 다 고급 어종들이었다. 고기 몇 마리를 꺼내고 그물을 다시 바다에 넣었다. 그냥 놓아뒀다가 상고선이 고기를 사러 올 때 꺼내서 판다고 했다. 그걸 보면서 ‘남이 내 통장에 돈을 넣어주는 은행’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민박집 밥상에는 큼지막하게 썰어낸 탱글탱글한 자연산 회와 정성껏 끓인 생선 맑은탕이 올라왔음은 물론이다.박 씨는 돈목마을에서 여태 고기를 잡고, 민박을 치고 있다. 17년 전의 생활과 달라진 게 별반 없어 보였다. 놀라웠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섬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17년 전 이야기를 꺼내자 박 씨 내외는 그때를 기억해냈다. 아침 밥상을 물리고 나서 박 씨가 “그날처럼 그물 보러 다시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번에는 박 씨의 아내 한영단(64) 씨도 따라나섰다. 풍성 사구 뒤쪽 성촌 앞바다에 쳐놓은 두 개의 정치망을 건져 올렸다. 그물 안에서 노란 빛깔의 황석어와 함께 무쇠 솥뚜껑만 한 대물 광어와 감성돔, 농어, 돌돔, 장어까지 줄줄이 뱃전에 부려졌다.돈목마을에 머무는 내내 받은 밥상은 끼니마다 황송했다. 자연산 생선회는 찰진 맛이 일품이었고, 비단조개를 잔뜩 넣어 끓여낸 조갯국은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수 뜯고 말려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의 향은 진했고, 튀겨낸 꽃게는 고소했다. 잘 구운 농어나 말린 생선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왔다.우이도 여행의 매력은 이런 ‘관계 맺음’에 있다. 우이도에는 여관이나 펜션은 물론이고 식당도 하나 없다. 도리 없이 먹고 자는 걸 민박집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우이도처럼 한적한 섬에서의 민박은 그저 ‘잠자리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만 열어놓는다면 민박집 손님은, 자연스럽게 주인집의 생활 속으로 편입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섬에 식당이 없으니 하루 세끼를 다 민박집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누구든 주인집 거실에서 한데 모여 밥상을 받게 되니 왜 안 그럴까. 섬마을의 민박집에서는 손님과 민박집 주인이, 손님과 손님이 교유한다. 섬이 작으면 작을수록 그럴 확률이 높다. 작은 섬을 여행하는 재미다.■ 우이도는 멀다목포에서 배를 타면 우이도까지 4시간이 넘게 걸린다. 목포에서 우이도까지 가는 배는 하루 1번뿐. 배는 오전 11시 45분 목포에서 출항해 딱 중간쯤에 있는 섬 도초도에 들렀다가 우이도까지 간다. 여기다가 도초도∼우이도 구간만 운항하는 배가 1번 더 있으니 우이도까지 가는 배를 하루 2번 운항하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배 안에 앉아 있다가 돌아 나온다면 모를까, 우이도는 당일로 들고나는 게 불가능하다. 우이1구에서 2구까지 걷고, 상산봉 산행을 하고, 진리∼예리마을∼돈목마을을 잇는 우이도 둘레길까지 걷는다면 2박 3일로도 빡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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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한영섭“매일 100회씩 팔굽혀펴기·턱걸이”…“자세를 낮추라” 평생 좌우명 실천

96세 한영섭“매일 100회씩 팔굽혀펴기·턱걸이”…“자세를 낮추라” 평생 좌우명 실천

글·사진=박현수 기자 ‘한 손에는 마이크, 다른 한 손에는 총’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 종군기자 겸 6·25참전군인인 한영섭(96)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은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을 세상에 알린 유일한 증언자다. “38선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귀향 중인 장병들은 속히 귀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오전 6·25전쟁 발발뉴스가 당시 유일한 방송국이었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을 통해 전국으로 송출됐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보도한 최초의 전쟁소식으로, 이 기사를 작성한 주인공은 한영섭 기자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북한 전 지역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 중공군 개입으로 함경북도 청진에서 철수작전이 떨어지자 장진호전투에 투입됐다가 후퇴하는 미군과 흥남에서 합류해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보도한 유일한 기자도 그였다. 격전의 현장이었던 청진과 흥남, 원산 등 최전선까지 다니며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전장의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펜과 마이크를 든 종군기자로, 때론 군인으로 총을 들고 북한군과 싸우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후 1951년 7월부터 시작한 휴전협상이 약 2년간 이어졌고, 지루했던 휴전협상 현장도 그는 모두 지켜봤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그의 방송 보도 첫 마디는 “이제 총성은 멎었습니다”였다. 6·25전쟁의 시작과 끝을 보도한 유일한 기자였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한영섭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6.25 전쟁 영웅’이다. 전쟁이 끝나고 KBS 보도실장(현 보도본부장) 재직 시절 장면 내각이 보도검열을 하겠다고 하자 “자유당 정부 때도 하지 않던 보도검열을 민주정부를 자처하는 정권이 검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해 그만둘 정도로 언론인으로서 강단과 소신을 가졌다. 이후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장, 6·25종군기자동우회장, 대한언론인회 원로상임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각종 매체와 군부대 등을 돌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안보의식 강조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장(전 대한언론인회장) 추천으로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한 회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27일 한 차례 더 진행했다. 지금까지 명사의 건강법에 소개한 명사들처럼 그 역시 나이에 비해 건강했다. ‘팔굽혀펴기’를 첫 번째 건강비결로 꼽았다. 하루 100회씩 매일 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이상도 할 수 있지만, 무리라고 생각해 그 정도만 한다. 팔 근육뿐만 아니라 가슴과 어깨, 다리까지 근력을 향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전신운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팔굽혀펴기를 오래 한 덕분에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승용차가 있지만, 건강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지난 2월 시내버스를 탔다가 누군가 자리를 양보하길래 앉으러 가다가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넘어져 현재 지팡이를 이용하지만, 거의 회복했다. “이처럼 빠른 회복도 팔굽혀펴기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그만의 운동법은 턱걸이다. 하루 100개씩 한다. 요즘은 매달려서 절반만 하는 턱걸이를 한다. 공원에 있는 철봉대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집에 들여놓은 조립식 철봉 기구를 이용한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만 해도 별도의 스트레칭이 필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 100개씩은 건강한 젊은 사람들도 하기 버겁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집에서 기구를 이용한 실내 자전거 타기다. 보통 1000회 정도 페달을 밟는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이 3가지 운동을 약 1시간 정도 하고 나면 땀이 흠뻑 흘러내린다고 한다. 이 같은 운동은 30대부터 시작해 7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다. 이렇게 일과를 시작하고 샤워 후 하는 아침 식사량이 많아 체중이 늘어 요즘은 다이어트 차원에서 토스트와 계란, 우유 한잔으로 가볍게 한다. 그 대신 점심과 저녁 식사는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운다. “밥심이란 말이 있잖아요.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이 납니다”라고 말했다. 집 인근에 있는 공원까지 산책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다. 약 30분간 3000보 정도를 기본으로 걷는다. 과거에는 어떤 운동을 했는지 궁금했다. 80대까지 30년 넘게 골프를 즐겼다. 홀인원도 한 차례 했고, 한창때는 36홀은 기본이고 54홀을 돌기도 했다. 또 유도는 초단증까지 땄을 정도로 열심히 했고, 축구도 즐겼다. “나이를 먹으니까 생각이 차츰 움츠러들어요. 그래서 가능한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머리와 가슴과 신체를 지배하고 순화해요. 아마 이것이 건강비결이 아닌가 여깁니다” 1950년 10월 2일 청진으로 진격하던 국군을 따라 전선으로 향하다 매복 중이던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인들과 함께 응사하던 중 옆에 있던 상사가 “위험해 자세 낮춰”라고 외마디를 지르는 순간 그는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상사의 마지막 말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고 한다. 한 회장은 “그때 그 상사의 ‘자세를 낮추라’는 조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자세를 낮추라’는 말과 의미는 다르지만,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스스로 돌아보는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영섭 회장이 걸어온 길 1928년 12월 서울에서 출생했다. 성남고와 동국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했다. 1950년 2월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입소해 생도들과 함께 2주 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경력으로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자원해 국내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종군기자로 종횡무진하며 전쟁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전쟁이 끝난 후 내신부장을 거쳐 보도실장(현 보도본부장)을 지냈다. 보도실장 재직 시절 정부의 보도검열에 반발해 그만두고 월간영자지 ‘코리아 리버티’ 발행인과 사장을 맡았다. 이어 육왕교통(주) 대표이사 사장, 삼양식품(주) 전무이사, 전자제품 부품제조 회사인 T사를 설립해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금성사 성력회(星力會) 회장, LG전자협력회 중앙회장 등을 지냈다. 이후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장, 대한언론인회 총무이사, 부회장, 감사, 원로상임위원장 등을 맡았다. 특히, 그는 방송동우회장을 20년 넘게 맡아 우리말의 우수성을 알리고 바른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1990년 ‘바른말 보도상’을 제정해 32년째 운영하면서 올바른 우리말 사용하기 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제1회 수상자에 이인용(MBC), 문재철(KBS)에 이어 박영선, 정동영, 박광온, 박수택, 조순용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이 다수 수상자에 뽑혔다. 그는 “국적불명의 언어, 줄임말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돼 우리말이 제 모습을 잃고 오염돼 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말꼴을 지키며 바른말을 쓰는 것은 우리의 혼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 회장은 또 ‘한일 단파방송연락운동’을 기념하는 물망비(勿忘碑)를 KBS 본관 옆에 세워 해마다 기념 행사를 갖고 일제 말기에 단파수신기를 제작해 국민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다 검거돼 옥사한 선배 방송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이밖에 6·25참전언론인회 창립 산파역으로 참여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상훈으로는 1959년 대통령 표창과 1996년 수출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예절교육의 전당인 ‘예지원’ 원장을 약 35년간 지낸 부인 강영숙(93) 여사는 우리나라 제1호 여성 아나운서로, 결혼 당시 방송인 커플로 주목을 받았다. 슬하에 기원·기두·기조 3남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다. 한 회장은 요즘 6.25 주요 전투상황을 기록한 전쟁일지를 비롯해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를 엮은 ‘나는 이렇게 싸웠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 “평화는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6·25는 국민 안보의식이 없어 일어났어요.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그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게 없어요.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대비하려면 국민 안보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국가가 힘이 있어야 하고, 군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의 우를 또 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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