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게재 일자 : 1998년 08월 22일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29)해방후 첫 베스트셀러와 ‘九人會’

1946년 1월 창간된 新天地표지
미군은 내 고장 시골도시에도 마침내 나타났다. 주름이 잘 선 바지에 넥타이까지 맨 군복을 입고 종이배 모양의 모자를 비스듬히 머리위에 얹고 다니는 碧眼(벽안)의 미군병사(GI)…. 그들이 처음 ‘출현’했을 때 우리들은 마치 위성에서 날아온 별세계인처럼 그 진기한 모습을 구경하러 나갔었다.

미군이 진주하면 제일 먼저 착수하는 것이 통신기지의 설치이다. 전주 梧木臺(오목대)의 건너편 산에 통신기지를 세우기 위해서 불도저가 산을 밀고 올라가 삽시간에 자동차 도로를 내는 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걸 구경한 인파에 섞여 있던 일본인이 내 옆에서 신음소리와 같은 탄성을 내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동원해서 삽과 괭이로 소나무 뿌리를 캐서 그걸로 만든 ‘松根油(송근유)’로 ‘가미카제(神風)’특공대가 자살폭격하러 가는 片道(편도)의 기름을 대주면서 ‘결사항쟁’하려 했던 일본제국이었다. 그 가난뱅이 나라가 겁도 없이 대들었던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지금 눈앞에서 처음 보는 불도저를 통해 소스라치게 깨달은 놀라움이 일본인의 신음소리같은 탄성으로 표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 그것은 그야말로 텍사스 오일에 대한 송근유의 싸움이요, 불도저에 대한 삽과 괭이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미군이 진주해 본격적으로 군정이 실시되자 영어의 수요와 영어학습의 열기가 유행처럼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공부하자면 무엇보다도 사전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게 마련이다.

1945년 말인지, 1946년에 들어서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얄팍한 팸플릿 따위의 소책자만 쏟아져 나왔던 책방에 마침내 수백쪽짜리 영어사전이 등장했다. 柳螢基(유형기)편 ‘新生英韓辭典(신생영한사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民衆書館(민중서관)에서 새로 사전들을 편찬할 때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우리나라 시장을 독점했던 유일한 영한사전이었다. 해방후 최초의 소리 소문 없던 베스트셀러요, 스테디셀러요, 롱 셀러였던 셈이다.

정부수립 이전의 혼란과 궁핍속에서도 그처럼 대중적 수요의 폭발이라는 시장메커니즘을 꿰뚫어 보고 수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을 내서 착실하게 재미도 본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유형기 목사를 그로부터 15년후 뜻밖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은 내 행운에 속한다.

네카 강변의 마구간을 개수했다는 하이델베르크의 멘사(대학식당)에서 어느날 저녁 줄을 서 있는 젊은 학생들 틈에 은발이 시원한 동양의 한 노신사가 알루미늄 밥그릇과 나이프, 포크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유형기 목사를 처음 만나뵙게 된 기연의 장경이다. 한국감리교회의 ‘감독(bishop)’이라는 수장의 자리에서도 은퇴한 뒤 여생을 오랜 숙원인 성경의 새로운 번역에 바쳐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훌륭한 성경번역의 모범으로 치는 마르틴 루터의 독어 번역판을 보아야 되겠다, 그러나 독일만은 옛날 하버드대학 유학시절에 공부를 한뒤 담을 싸버렸으니 지금부터 다시 해도 될 것인지 시험삼아 독일말 공부를 ‘재수’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칠순에 가까웠던 유목사는 우리나라의 선구자적인 미국유학생에 속하는 개화신사답게 20대의 독일 젊은이들 틈에 끼여 기숙사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나 어색해함이 없이 오히려 유럽 古都(고도)의 유서깊은 대학에서 노소동학의 만학 생활을 유유자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 이따금 무료함을 느낄때 말벗이 필요하면 곧잘 나의 우거를 예고없이 찾으시곤 했다. 지금도 후회막급인 것은 왜 그때 유목사의 얘기들을 기록해두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의도없이 심심풀이로 들려준 유목사의 얘기들 가운데엔 그때까지도, 혹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일들, 특히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시대의 한국현대사에 관한 매우 중요한 일들의 ‘숨은 얘기’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청취할 수 있었던 미군정사에 관한 한 ‘오럴 히스토리(말로 남기는 역사)’였다.

가령 ‘九人會(구인회)’에 관한 얘기.

시인 李箱(이상) 金起林(김기림), 소설가 李泰俊(이태준) 朴泰遠(박태원)등이 일제시대에 만든 문인 그룹 ‘구인회’가 아니라 또다른 ‘구인회’가 해방후에 있었다는 얘기를 나는 유목사로부터 하이델베르크의 객사에서 처음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 군인들이 들어와서 군정을 실시한다는데 그 사람들이 글쎄 한국사정을 아나, 한국사람들을 아나, 한국말을 아나…. 그래서 미국유학 출신이 많았던 우리 구인회 멤버들이 미군을 많이 도와주었지…. 李卯默(이묘묵)군은 그중 영어를 잘했기에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통역을 맡았어…. 趙炳玉(조병옥)군은 야심도 있고 패기도 있고 해서 경찰을 맡기로 하고…. 兪億兼(유억겸)군은 연희전문학교를 오래 이끌어 온 경험도 있고 해서 교육쪽으로 가기로 했지…. 河敬德(하경덕)군은 하버드대학에서 사회학박사를 한 사람이라 언론분야를 맡았어….” 주한 미군 최고사령관의 통역을 맡은 이묘묵 박사는 정부수립후엔 초대 영국공사로 부임했다.

조병옥박사는 미군정시대 경찰의 총수인 경무부장으로 있다가 정부수립후엔 대통령 특사, 내무부장관 등 요직을 맡은뒤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 1960년엔 민주당 공천을 받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미국서 신병 치료중 타계한 1950년대 한국 정계의 거물이다.

兪億兼박사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일제시대의 연희전문학교 학감, 부교장 등을 맡았다. 해방후에는 연희전문학교교장, YMCA회장으로 있다가 미군정청의 학무국장, 초대 문교부장에 임명되면서 당시 문교부차장이던 吳天錫(오천석)박사가 제안한 국립대학설립안(좌익에서 맹렬히 반대했던 소위 ‘국대안’)을 실현시키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분이다.

그리고 河敬德박사는, 지금의 주미대사 李洪九(이홍구)박사가 서울대학교 재직시절 언젠가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더니 지금도 1920년대에 河敬德 박사가 쓴 학위논문을 교제로 쓰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 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

일제시대엔 연희전문학교 교수생활을 하면서 YMCA운동·흥사단 운동에도 참여, 해방된 다음엔 코리아 타임스의 창간 사장, 합동통신의 사장등을 역임했으나, 그가 해방공간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정부수립때까지 서울신문 사장으로 재직했을 때이다. 당시의 서울신문은 비록 미군정청의 기관지로 발족하긴 했으나 어느 의미에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좌우의 政論紙(정론지)만이 쏟아져 나온 좌우격돌시대에 가까스로 불편부당의 중립을 유지했던 거의 유일한 ‘권위지’였다. 뿐만 아니라 하경덕 박사가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월간지 ‘新天地(신천지)’도 정부수립 이전까진 가장 많이 읽혔던 종합잡지로, 나도 ‘신천지’를 통해서 전후 파리의 상제르망 캬페에 둔을 치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인·예술가 들에 관한 소식같은 걸 얻어 듣곤 했었다.

이렇게 네 사람에 유형기 목사까지 합쳐 다섯 사람의 이름은 지금도 확실하게 생각이 나는데 9인회의 나머지 네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좀체 잡히지가 않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기는 하나, 도무지 자신이 없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그냥 덮어 두는 것이 나을 성싶다. 옛날을 돌이켜 볼 때마다 이렇게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하고 생각될 뿐이다.

그건 그렇고- “유선생님은 그럼 무얼 맡으셨나요?” 당신의 사사로운 일에 관해서 얘기할 때마다 유목사는 피시시 웃으시곤 했다.

“나야 그저 장사나 했지….” “돈 많이 버셨나요?” “해질 때면 사람들이 돈을 가마니로 싸가지고 와서 마당에다 풀었어….” 그저 장사나 했다는 것은 물론 유목사 나름의 언더스테이트먼트(겸양의 수사)였다. 유목사는 포켓판 영한소사전을 먼저 내놓은 다음, 우리들이 해방된 이듬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엔 두손으로 펼쳐보는 영한대사전도 내놓았다. 해방공간의 혼란속에서 너도 나도 좌우의 정치싸움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되는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대서 유목사는 베스트셀러 사전을 편찬한 출판사의 사장만은 아니었다. 성경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에게는 유목사가 역간한 ‘단권주석’은 필독의 고전이란 얘기도 들었다.

해방후 미군정치하에서 첫 베스트셀러가 된 유목사의 ‘신생영한사전’과 유목사가 들려준 ‘구인회’의 얘기. 그것은 결국 모든 통치는 말길이 뚫려야 가능하고 그렇기에 말길을 장악한 사람이 언제나 지배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입증해준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는 한문이, 일제시대엔 일어가, 그리고 해방후부터는 영어가 그러한 말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병옥 박사는 미국 유학생 출신이셨는데도 경무부장 시절엔 통역을 두었다고 하던데요?” “조군, 영어 못해!” 딱 잘라 대답하신 유목사는 좀 지나쳤다 싶으셨는지 “20이 넘어서 미국에 오면 영어는 못배우고 가…”라고 주석을 붙였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학이라고 나온 처지에 유목사의 말은 너무 무자비한 폭언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뒤 세월이 가고 내 귀가 독일말에 조금씩 트이게 되면서부터 유목사 말씀은 폭언이 아니라 진리라고 느껴졌다. <최정호. 연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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