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철수 칼럼> 유럽 知性들의 마르크스 결별史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진철수 칼럼

근 10년전 기자가 특파원으로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 신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한 뒤인데도 공산당 하원 의석이 20여석이나 되고 당 기관지가 어엿이 일간지로 나오고 있어 공산당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생각을 했다.

2차대전 후 서유럽 국가들 의회에서 공산당 의원들이 차지한 의석 수를 종합해 보면 46년에는 12.8%, 50년 12월에는 11.6% 등 10%를 상회했다. 이어 50년대에서 80년대 전반에는 대체로 10% 미만이면서 감소 추세를 보인 끝에 80년대 후반에는 6.6%까지 내려갔다.

같은 시기에 서유럽 나라들 사회민주당들은 29%에서 35% 정도를 차지했다.그후 소련 공산권이 무너진 영향으로 판국이 바뀌었겠지만,이러한 통계를 보면 친소 마르크스주의자 세력이 서유럽 지식인사회에 다년간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퓌레,공산주의 환상 이유밝혀

최근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프랑스 역사학자 프랑수아 퓌레(1927∼97)의 저서 ‘환상(幻想)의 종언(The Passing of an Illusion)’에 따르면 2차대전 전에는 파시즘의 등장이 소련 공산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주요한 구실이 되었으며 전후 40년대와 50년대에는 미국의 제국주의, 군비 경쟁, 매카시즘 등이 그 구실을 했다.

프랑스혁명 연구가인 퓌레는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로, 68년 바르샤바조약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 항쟁을 유린한 이후 지성인들의 사상적 전향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이다. 레몽 아롱을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그는 지성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해방되어 민주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퓌레도 원래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56년 헝가리 국민의 항쟁이 소련군 개입으로 유린되는 것을 보고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유럽의 지성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공산주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혔으며 왜 빨리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던가를 규명하는 연구를 해왔다.

당초 유럽의 지성인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파탄 상태에 이른 것을 목격하면서 17년 러시아혁명이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영했다.이들은 공산주의가 과학과 윤리를 결합시켜 주었다며 좋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20∼30년대에 소련에서 들려오는 숙청,기근,학살에 관한 소식이 믿을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퓌레의 분석이다.그는 공산주의가 합리적인 반론의 성립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의 심리적 투자를 이들에게 요구하였다고 설명하면서, 말하자면 이들이 변증법적 환상에 매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30년대 지식인들의 관심은 경제에서 파시즘으로 옮겨갔으며 스페인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비인도적 처사들에 대한 소식도 전쟁의 일환으로 벌어지는 악선전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넘기려 들었다.

한편 모스크바에 찾아든 수많은 친공(親共) 인사들 중에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인 페이비언주의자들이 끼여 있었다. 문제는 파시즘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소련의 위협 등 파시즘과는 상관없는 위협에는 눈을 감아버린데 있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히틀러와 손을 잡은 독·소(獨·蘇)협정도 그 후에 벌어진 소련의 영웅적인 스탈린그라드 방위로 속죄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식이었다.

파시즘열풍에 소련참상 못봐

유럽 지식인들 중에도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제국주의나 매카시즘에도 반대하는 양식있는 지성인들이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환상을 떠나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다수의 지성인들의 혹독한 모욕을 감수해야 했었다고 퓌레는 썼다.

문제의 핵심은 지성인들이 공산주의라는 환상을 믿고 싶어하는 의지 때문에, 사리를 따지고 회의(懷疑)를 품어보는 이성의 활동이 마비된데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심상치 않은 역사의 단면은 동유럽 공산권 붕괴가 일어나기 훨씬 전 얘기다. 그렇다고 지금이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라고 해서, 또 여기가 유럽이 아니라고 해서 무심코 넘길 일은 아닐듯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