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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달의 문화인물 게재 일자 : 2000년 02월 08일(火)
정월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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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 나혜석 사진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20대중반 결혼초기의 모습, 파리 체류시 모습, 이혼 직전자녀와 함께한 모습, 이혼후 화살에서의 모습, 배경그림은 나혜석의 작품 3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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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석(羅蕙錫 1896∼1948)전쟁’ 은 끝나지 않았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작가였고 독립운동에도 앞장 섰던 그는 급진적인 여성해방 논리로 무장하고 산문과 그림으로, 때로는 온 몸으로 봉건적 인습과 싸우다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장렬하게 산화한다. 그가 죽은지 반세기나 지났지만 그가 타파하고자 했던 가부장제적 억압은 여전히 공고하다. 제2, 제3의 나혜석은 지금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신여성’나혜석을 이렇게 상찬할 수 있게 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는 김명순 김일엽과 함께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만 천박하게 이해되어 왔다. 자유연애론은 종종 방종과 동의어로서 입방아에 올랐다. 그가 절박하게 말한 ‘나의 삶이 걸작이 되고 싶어요’는 작품이 별 볼일 없으니 몸으로 때운다는 의도적 오해의 빌미가 되었다. 특정 여성만을 선정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전체 여성집단은 모래알로 만들어 두려움을 덜어보자는 것이 남성중심사회의 전략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나혜석은 땅에 묻혔고 ‘나혜석 신드롬’만 무성하게 무덤을 덮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나혜석의 진실캐기도 계속되었다.

1970년대 초 미술평론가 이구열씨의 나혜석 평전이 출간되었을 때 그를 바람 피우다 이혼당한 여자쯤로 치부하던 사람들은 충격를 받는다. 그 책에 수록된 나혜석의 방대한 글에 압도되었고, 거기에 담긴 내용 또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연애가 있는 결혼은 덕이요, 연애가 없는 결혼은 부덕’이라고 말한 엘렌케이 사상을 받아들여 자유로운 연애가 개인을 해방시킨다는 논지를 폈으며, 여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부르짖었다. 나혜석이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주창한 신여성론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함께 저울질되기도 한다. 책 제목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는 실제로 이혼한 뒤에 헤어진 자식들에게 남긴 글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에서 따온 것이다. 나혜석이 선각자로 당당히 복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80년대 초 나혜석의 소설과 시, 기행문 회고기 등 산문은 전집 ‘날아간 청조’로 다시 집대성된다. 그리고 80년대말 서정자교수에 의해 소설 ‘경희’가 발굴되면서 나혜석은 발군의 페미니즘 작가로 화려하게 조명 받는다. 이렇게 되자 본업이라고 할 수 있던 그림에 페미니즘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 의문시되었는데 최근 들어 여성의 일상사를 묘사한 초기 판화작품이 주목되면서 여성주의 화가로서 재해석될 수 있는 길이 트이고 있다. 나혜석 기념사업회(회장 유동준)는 지난해만 두차례나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리고 2000년 벽두 이상경 교수가 ‘나혜석 전집’과 평전 ‘나혜석’을 잇달아 내놓아 나혜석 바로알기의 열기는 절정에 오른 느낌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나혜석의 저항의식은 ‘세컨드 콤플렉스’로 부터 비롯된다는 시각도 있다. ‘신여성’ 김명순은 갑부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세컨드 콤플렉스’가 생래적인 것이었다면 나혜석의 경우는 그가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가 첩을 얻은 것이 계기가 되어 촉발되었을 것이다. 수원의 토호세력으로 용인군수를 지낸 아버지는 딸을 일본에 유학시킬 만큼 개명했지만 딸이 명문가와의 결혼을 싫다고 하자 학비지원을 중단하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제하의 남성이었다. 나혜석이 아버지의 강요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무렵 시인 최승구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휴학을 하고 1년간 여주에서 여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비를 모은 뒤 복학을 한다. 그러나 최승구는 폐병으로 요절하고야만다. 그의 죽음은 자유연애와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한 여성에게 닥칠 신산을 예고하는 운명의 복선 같은 것이었다. 훗날 나혜석은 신혼 여행길에 남편 김우영과 함께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워준다.

나혜석이 어떤 의도로 그랬건 간에 그 상식을 깨는 사건은 분명 자신이 언제라도 최승구의 비석으로 상징되는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인형의 집을 탈출한 노라처럼. 애인 최승구가 죽은 뒤 나혜석은 한때 춘원 이광수와도 가까이 지낸다. 두 사람 사이가 깊은 관계였을 것이라는 것은 지레짐작일 뿐 어떤 증거도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혜석의 글쓰기가 필명을 날리던 춘원의 자장 안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단편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경희’는 1910년대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다른 작품들이 당대 여성의 현실을 묘사하는데 있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오히려 ‘신여성’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무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희’가 간접적인 설득으로 계몽 효과를 높이고 있는 반면에 ‘무정’은 설교조에 빠져 작품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나혜석은 이후에도 구여성들이 겪고 있는 질곡을 다룬 단편을 발표하지만 대여섯편에 머무르고 만다. 하지만 그는 ‘경희’ 한 편만으로도 근대문학을 연 최초의 여성작가로 우뚝 서게 된다.

3.1운동 때 5개월간 옥살이를 한 나혜석은 석방에 도움을 주었을 ‘만세 변호사’(만세운동으로 체포된 동포의 변론을 맡아 유명해짐) 김우영과 1920년 결혼을 한다. 결혼 조건중 하나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다. 나혜석이 스스로 화가를 본업으로 생각했음을 환기시킨다. 이듬해 그는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추진한다. 언론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가 뒤따랐고 5천명의 인파가 몰려드는 대성공을 거둔다. 근대미술사의 일대 사건은 이렇듯 만삭의 여인에 의해 저질러지고 마는데 나혜석은 여성 미술운동 차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회화와 조선여자’라는 글을 통해 밝히고 있다. 안따까운 것은 그 때 전시된 70점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도 상당 부분 태작이거나 진위마저 의심받고 있어 나혜석 작품의 망실은 심각한 실정이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하여 신문에 발표한 세시풍속 삽화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나 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케 하는 목판화 ‘조조’ ‘개척자’를 통해 민족현실을 작품에 담아내는 만만찮은 필력과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민족운동가 나혜석’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그가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이주하면서 예술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지지만 그의 민족운동은 보다 행동화된다. 의열단 사건에 개입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독립운동 자금의 국내 반입 등에 부영사라는 직위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나혜석은 26세부터 31세까지 만주에 머무는데 이 무렵이 그의 인생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조선미전에 잇달아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첫딸에 이어 두 아들을 나았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으면서 모성애를 절대시하는 인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여성의 고통을 공론화한 글 ‘모(母)된 감상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그의 삶에도 그늘은 있었다. 자신의 재능에 회의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남편에게 구미 여행의 특전이 주어졌으니 뜻밖의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었다.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고, 파리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유럽의 박물관을 돌며 명작 그림들을 감상하고 화실을 다니며 그림 공부도 했다. 그리고 나혜석은 파리로 건너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이 소문이 국내에 들어와서 다시 불거져 나오자 남편은 즉각 이혼을 요구했다. 당당할 것 같던 나혜석도 남편에게 매달리는데 결국에는 네 자녀를 두고 쫓겨나고 만다. 이혼 후 그는 한동안 그림에 전념하지만 심신이 지친 탓인지 작품 수준은 예전같지 않았다. 선전에 낙선한 뒤로는 물감을 살 돈도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림을 배운 조선의 작가들은 근대의 추구가 곧 일본의 추구가 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서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표현의 폭을 넓히기도 했던 나혜석이 자신의 희망대로 자주적인 그림세계를 펼칠 수 없었던 것 자체가 화가에게는 비극이 아니었을까. 이 시기 나혜석은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주력하는데 파리 체험은 그림 보다 산문 속에서 확대재생산 된다. 잡지에 연재한 유럽 여행기나 구미부인의 가정생활 등이 그렇고 불륜과 파경의 진실을 밝힌 ‘이혼고백서’도 파리 체험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혼고백서’는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는 남성과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이미 19세에 ‘이상적 부인’이란 글에서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는 나혜석은 40세에 쓴 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는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이지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나혜석의 여성해방론은 선구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주홍글씨’만 두드러져 보일 뿐 그가 서 있는 곳이 근대를 여는 한 지평임을 바로 보지 못했다. ‘나혜석 죽이기’만 난무했다.

그는 김일엽처럼 불교에 의탁하지도 않고 혼자서 외롭게 버티다 아무도 모르게 53세에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나혜석은 오빠의 호적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의 시선이 얼마나 싸늘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고, 그럼에도 당당히 자기의 길을 걸었던 한 여인의 불꽃같은 정신은 영원히 빛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글·오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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