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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네칼럼 게재 일자 : 2000년 03월 10일(金)
배우 문정숙이 남긴 한국의 여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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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인영·영화평론가
시대에 따라 영화에 따라 여성의 모습도 바뀌게 마련이다. 지난 1일 타계한 영화배우 문정숙씨. 1952년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인 ‘악야’를 시작으로 1996년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반세기동안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만도 100편이 넘는다. 특히 이만희 감독과의 만남은 ‘귀로’‘만추’등 한국영화에서 빼어난 걸작을 내놓았다.

과연 그녀가 스크린에 남긴 한국의 여성상은 어떠했는가. 50∼60년대의 대표적인 스타, 그녀의 이미지는 ‘칼날처럼 빳빳하게 풀을 먹인 치마저고리에 감춰진 열정’이었다. 정숙한 여인네라는 통념에 달칵 들어맞았다면 그토록 매력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숙하되, 순종과는 달랐다. 세상의 규범과 도덕률에 그저 순응하기보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와 확인의 끈을 놓치지 않는데서 배어나오는 정숙함이었다.

그녀의 이미지엔 공존하는 열정이 있다. 따라서 더욱 독특한 향내를 풍긴다. 이만희 감독의 64년작 ‘검은머리’에서는 아름다운 얼굴이 절반쯤 깊게 긁힌 모습으로 나온다. 갱단 두목인 남편이 겁탈당한 아내에게 외도를 했다며 얼굴에 배신자의 낙인을 찍고 내쫓았기 때문이다. 문정숙씨가 연기한 주인공 연실은 비록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비천하게 살아가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을 속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신을 살인보다 더 한죄로 여기는 조직의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희생시킨 남편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배반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그녀의 상처는 규칙이 인간을 제압하는 삭막한 도시가 남긴 것이다. 바로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고자 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영화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만희 감독의 67년작 ‘귀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주인공은 성불구가 된 상이군인을 택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그와 결혼하여 충정을 다한다. 그러나 이성과 책임만으로 꾸려지는 결혼생활은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강박으로 변한다.

이만희 감독이 포착한 60년대 서울의 풍경은 고가도로와 고층빌딩이 좌우수직으로 뻗어가지만 텅 빈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 풍경 속에 문정숙씨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현실에 대한 불안과 공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교차하는 미묘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그려낸다.

1961년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에서는 어려운 가계를 꾸려가는 서민 가정의 주부로 출연하여 노다지로 보였던 돼지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당대 현실을 보여 주기도 했다.

‘검은 눈동자의 우수’로 기억되는 명배우 문정숙씨, 그는 자신을 기리는 회고전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기 직전 타계했다. 그 영예를 생전에 관객들과 나누지 못했다는게 안타깝다. 그가 남긴 한국의 여성상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창조해 낼 여배우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남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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