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장준하 구국장정’ 의 큰걸음

21세기 문턱에서 세계사에 격변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치·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난 7일부터 10박11일 동안 장준하기념사업회와 문화일보, 국가보훈처가 공동 주최한 ‘장준하 구국장정 6000리’를 다녀왔다.

한국 현대사의 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인 장준하 선생이 56년 전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부대를 탈출한 뒤 조국 광복의 등불이 되고자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6000리 길을 대학생이 대부분인 ‘청년 등불’ 대원 53명과 함께 되밟았다.

이미 4회째를 맞은 장준하 구국장정은 중국 현지 언론들의 주목을 받으며 한·중 민간 교류의 새로운 전형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해 있었다. 중국 공산당 중화전국청년연합회의 공식 후원으로 장정단이 통과하는 지역의 시정부 및 공산당위원회, 공안 당국에서는 현장 안내, 군부대 및 관련기관 출입협조, 차량 에스코트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요 답사 도시인 난양(南陽) 린취안(臨泉) 푸양(阜陽) 등지에서는 현지 방송과 신문에서 장정단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취재·보도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인들은 한결같이 “선배들의 항일 혁명 정신을 배우기 위해 멀고 험한 길을 찾아온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나약해진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본받아야 할 훌륭한 애국청년의 모습을 제시하고 각성을 촉구하려는 것”이라고 취재 목적을 밝혀왔다.

시안(西安)에서는 중화청년연합회 소속 대학생들이 ‘한·중 청년 친선의 밤’행사를 개최해 장정의 대미를 장식해주기도 했다. 벌써 4회째인 이 행사를 통해 시안 젊은이들 사이에는 ‘한국 붐’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는 4월에는 시안의 대학생들이 한국을 공식 방문키로 약속한 것도 이번 장정의 소득 중 하나였다.

이번 장정에 참가한 우리들이 진정 보고 배우고자 한 것은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청년 장준하가 내린 숭고한 결단의 정신이었다. 온갖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청년정신과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몸부림을 몸소 느끼고 싶었다. 장준하는 장정길 내내 우리들에게 ‘왜 이 길을 21세기 벽두에 다시 가고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해 왔다.

하루하루 장정이 진행되면서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안일했던 삶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반세기 전, 저 지난했던 시기에 민족 광복을 위해 감행했던 고난의 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장준하의 장정은 패권주의에 물든 국제 사회가 총칼을 무기로 서로 먹고 먹히는 시대에 결행됐다. 지금은 어떠한가.

로렌츠의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베이징(北京)에서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얼마 뒤 뉴욕에서 폭풍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단언할 수 없다. 부끄러운 역사를 뼈아프게 경험한 우리가 우리에게 놓인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길을 고민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양쯔강을 가로막는 싼샤(三峽)댐 건설 등 서부 대개발의 현장을 살펴보며, 세계적인 경제·금융·무역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상하이(上海)의 도심을 걸으며 중국의 대변화를 몸으로 체험했다.

중국은 서부대개발이라는 화두 아래 명실상부한 21세기 세계 최강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가난했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낯선 이방인에게도 친절했던 중국의 농촌 사람들을 만난 경험은 돈을 주고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귀국 비행기에서 우리와 같은 때 상하이 푸둥(浦東)특구를 방문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소식을 접했을 땐 놀라움과 함께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도 중국이 한 축을 형성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장준하 구국장정에서 우리는 ‘민족사의 주인으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큼직한 빚더미를 안고 돌아왔다. 그 빚을 갚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장정의 경험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더불어 민족사의 앞길을 창조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진정한 구국 장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진용선·시인·정선아리랑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