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각하’와 ‘대통령님’

고려 무인정권시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사회는 역사적으로 무인문화·군사문화 중심이라기보다 문민문화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세계사가 부국강병·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가 되고 그 과정에서 타민족에게 강점당하게 되자 우리 문화의 문약성이 지적되고 비판되기도 했다.

그런 우리 민족사회가 1960년대 이후 30년간이나 군사정권시대를 겪게 되었다. 그 동안 세 사람의 직업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국방·외교는 말할 것 없고 경제부처 등과 심지어는 교육·문화 담당부처도 그 장관의 상당수를 직업군인 출신이 차지했다. 경찰과 일반행정, 민간 회사에까지 그 요직을 직업군인 출신이 대거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진출이 비교적 어려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대학교단에도, 정확한 통계를 못 가지고 있지만 적지 않은 직업군인 출신이 진출했음을 알고 있다.

직업군인 출신이 각 분야의 실권을 30년간이나 쥐고 있었다면 그 시대를 가위 군사문화시대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정권 30년 후에 다행히도 문민정권이 들어서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해도 나머지 경제·사회·문화면에서 아직도 군사문화의 잔재가 깊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면에서는 가령 ‘유신’체제를 폐지하는 등 구체적인 청산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무엇이 군사문화의 찌꺼기인지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함으로써 청산되지 않고 있는 점이 많은 것이다.

봉건적 질서 속에서 쓰이던 용어 중에 ‘각하’란 칭호가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군대’에서도 한때 사단장이면 모두 각하라 불렀고 부사단장을 ‘부각하’라 부른 희극도 있었다는데, 박정희정권부터 대통령에 한해서만 각하라 부르게 했다고 들었다. 요사이 방송극 같은데서 들으니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도 청와대나 관료사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해 ‘각하’라는 호칭을 그냥 썼던 것 같다. 다행히도 김대중정부에 들어와서 ‘각하’ 호칭은 없어지고 ‘대통령님’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군사문화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점도 많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할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일제시대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특히 중학교에서 상급생이 하급생을 이른바 ‘기합’ 주는 일이 예사였고 해방 후에도 그 유풍이 일부 남았다가 곧 없어졌다.

해방 후 군사정권시대 이전의 대학에는 물론 이런 찌꺼기가 없었다. 대학생들이 한두 해 선배라 해서 후배의 이름을 존칭 없이 마구 부르거나 ‘해라’ 하지 않았다. 김형·이형이라 부르고 ‘이랬소’ ‘저랬소’ 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지금의 대학사회에는 군대의 군번에 비유되는 학번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만 앞서도 아래 학번 학생에게 이름을 마구 부르고 말도 탕탕 놓는다.

재수생이 많은 세상이라 대학에 먼저 들어갔다 해서 꼭 나이나 사회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는데, 다만 학번이 앞선다는 이유만으로 연상의 하급생도 마구 ‘해라’하는 것이다. 군대가 그런 곳이다. 연령이나 사회경험의 많고 적음에 전혀 상관없이 상급자가 하급자를 마구 대하고 지배하는 것이 그 사회의 질서요 문화다. 대학의 학번제도는 물론 박정희 군사정권의 산물이다.

대학생은 성인이며 어느 사회계층보다 자유인이요 창조성 높은 인간이어야 하는데, 학번이 앞선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무조건 말을 놓고 지배하려는 일, 학번이 뒤졌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일 역시 ‘밥그릇’, 즉 복무기간을 따져 복종을 강요하고 감수해야 하는 비민주적 군사문화의 잔재다.

뿐만 아니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뮤직 비디오인가 하는 것도 상당히 애조 띤 노래의 배경 화면으로 처절한 전투 현장이 깔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군가가 아닌 유행가의 배경 화면이 왜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30년 군사독재시대를 겪은 우리 사회라 정치면의 군사문화 잔재가 가장 심각하긴 하지만, 경제·사회·문화면에 끼친 그 찌꺼기도 세밀히 찾아내 청산하는 일이 요긴하다. 20세기가 제국주의와 냉전주의 시대였던데 비해 21세기는 평화주의와 문화주의 시대가 되기를 인류사회 전체가 희원하고 또 지향하고 있다. 이같은 세계사적 조류에 합류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각 부문에 스며있는 군사문화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 본래의 문민문화를 발전적으로 살려내야 할 것이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