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나누는 곳에 희망이 자란다

얼었던 나무 속에서 꽃들이 터져 나왔다. 얼었던 땅 속에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아무도 이름 부르지 않아도 아기들 손톱만한 꽃이 핀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희망이 있다.얼었던 나무를 헤치고 나오는 꽃이나 풀처럼 모진 추위를 견딜 때 갖는 희망이다.그러나 지금, 따스한 4월에 여기저기 만개한 꽃들을 두고도 우리는 세상의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이제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에 대한 회의와 이 모진 추위가 걷히긴 걷힐 것인가? 에 대한 불안이 모두의 가슴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경제가 허풍경제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화 ·교육·복지 등의 모든 생활여건 속에서 싹트고 있건 암덩어리들의 실체로 드러났으며 우리나라는 중병걸린 환자가 되고 말았다.

이제 70이 넘은 내가 기억하기에도 최근 한 달간의 화두(話頭)는 수없이 많다, 건강보험 운영의 파탄과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의 지출,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 그 밖에도 넘쳐나는 우울한 화제들로 신문이 가득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던 시대는 이제 정말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빈부격차의 구조가 얼마나 더 탄탄해져 가고 있는지 그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원인분석을 해 보지만 대안이 없거나 그 대안이 별로 신통치 않아서 우울한 기색이 가시질 않는다. 실물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느니, 소비심리지수가 회복된다는니 하는 언론의 보도는 서민들에게는 먼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리고 누가 가르쳐주지고 않았는데 IMF3년을 지내고 올해부터 '제2의 IMF'라고들 한다. 더 깊어진 서민들의 주름살과 깊은 상처는 왜 이리 아물지 않는지.

성결 마태복음 20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찾아 나갔다. 아침 일찍 만난 사람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고 오전 아홉시에 만난 사람도 일하게 하고 정오에 만난 사람과 오후 세 시에 만난 사람,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만난 사람에게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였다. 날이 저물자 주인이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주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들이 항의 하였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품？？？똑같이 주느냐고.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이다.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관계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의도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 상황이 있다. 그것은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를 비유하는 예화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는 오후세시와 다섯시에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은 게을렸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 일을 시켜지 않아서 놀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실직과 고용불안이 있었나보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한 그 해결방법은 정말인지 '하늘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초국적기업들이 강력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 하늘나라의 방법대로 평등을 추구하고자 감히 말할 수 없다.
아무런 대안 없이 외쳐대는 주장에 이미 식상해 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아무런 외침 없이 행하는 작은 일에서 하늘나라를 꿈꾼다. 자신의 관심과 시간, 재능과 금전으로 오후 다섯시에 일하려 온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그 일은 분명 반가운 희망이다.

어떻게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보자고 덤비는 많은 자원활동가들과 단체들이있다, 매맞는 아이들부터 혼자 사시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자들과 장애인들과 억울한 사람까지. 그리고 먹는 일에서 잠자고 생활하고 생각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남들처럼 아침부터 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구석구석 찾아가는 그 활동에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박수가 우울한 시대가 마시는 청량음료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멀리서 박수치는 무임승차로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서 우울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보태야 할 시기이다. 언땅을 녹이고 봄꽃을 바라보는 희망도 그들만의 몫이다.

<김성수 주교 상공회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