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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03년 11월 06일(木)
연애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
연애의 시대/권보드래 지음/현실문화연구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밴드
무수한 탈근대 담론이 횡행하는 한편에서 아직도 근대성의 표상인 독립된 주체로서 개인의 부재가 계속해서 논의되는 사회가 21세기초 한국의 자화상이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착종돼 있을 뿐만아니라 근대도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와 개발독재로 건설된 산업화된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전개 등 다양한 지층이 공존하고 있다.

이 점에서 1920년대 초반 신문과 잡지 등의 기사와 유행소설을 통해 당시 문화를 사로잡았던 현상으로 ‘연애’를 포착해낸 책은 근대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책은 영화포스터, 만화 등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해 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해온 출판사의 기획물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랴’와 ‘모던뽀이 경성(京城)을 거닐다’의 뒤를 잇는 책이다. 서울대 국문과 및 대학원을 나와 현재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에 재직중인 저자도 이전의 기획물처럼 일제시대 독립군이나 친일파가 아닌 당시를 살아간 절대 다수의 대중이 일상에서 느낀 경험에서 이식된 근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책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연애’나 ‘사랑’이란 말과 낭만적 연애와 자유연애에 기반한 결혼, 스위트홈(행복한 가정) 등의 관념이 근대의 산물이란 전제에서 출발한다.

고구려 시대 ‘황조가’에서부터 가까이는 조선후기의 ‘심생전’이나 ‘운영전’에서 볼 수 있듯 폭발적인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어떤 시·공간에서나 발견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근대의 연애는 새로이 학습된 열정이란 것이다. 또 이같은 현상이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의 문화정치와 교육열을 바탕으로 이식된 것임을 지적한다.

사실 한국어에서 오래도록 ‘생각하다’는 뜻이었던 ‘사랑하다’가 남녀의 사랑으로 의미가 바뀌고, ‘연(戀)’과 ‘애(愛)’의 결합으로서의 ‘연애’가 널리 쓰이는 명사가 된 것은 근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연애와 관련된 대부분의 용어는 일본어 번역을 통해 들어왔으며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의 소설 등을 통해 일종의 이국 취향으로 경험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자유이혼을 주창한 스웨덴 출신의 교육학자 엘렌 케이의 글이 1921년 처음 한국어로 소개되면서 당시 신교육을 받은 이른바 ‘신남성’과 ‘신여성’의 연애열을 부추겼다. 이를 통해 조혼을 부정하고 진정한 생, 충실한 생을 개척하기 위해 이혼을 불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당시를 풍미하며 기혼남성들이 대거 연애와 결혼의 시장에 다시 투여될 수 있었다.

1920년대 전반 식민지 한국의 문화를 지배한 연애열은 3·1운동 직후 사상계를 풍미한 개량·개조의 바람에도 뒷받침을 받았다. 전근대적인 우리 것을 버리고 ‘새롭게’ 고치고 거듭나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자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사람들의 일상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연애열’로 전화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 기생과 여학생, 사랑과 결혼, 육체와 죽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연애의 첫번째 주역은 여학생이 아니라 기생이었다. 1910년대 까지만해도 유행을 선도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던 여성은 기생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교육을 받는 여학생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1923년이 되면 기생까지 여학생 복장을 모방해 물의를 빚게되는 일이 사회문제가 된다.

교육받은 ‘신여성’이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기생과 ‘조혼한 아내’였던 구여성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과정에서 화제가 된 것이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24년)과 강명화 자살(23년), 윤심덕·김우진의 동반자살(26년) 등 이른바 1920년대 3대 연애사건이었다.

이중 신여성이 주인공이었던 것은 윤심덕·김우진 동반자살뿐이고 강명화는 기생, 남편을 죽인 김정필은 구여성이었지만 모두 연애열이 초래한 새 문화 코드의 희생자였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연애가 하나의 새로운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총 19편의 연애편지를 모아 1923년 출간된 ‘사랑의 불꽃’이 당시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등장했다. 연애열과 문화열의 결합이자 출판기획의 산물인 이 책은 하루 평균 30~40부씩 팔려나가면서 연애서간집 붐을 일으켰다.

1925년 식민지 한국에서 연간 근7000만통에 달한 편지가 유통됐는데, 1945년까지 출간된 총 60편 정도의 서간체 소설 중 1920년대 창작된 것이 30여편에 달했다.

저자는 당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사람들이 많이 읽은 연애소설, 연애편지 등의 이야기를 통해 192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 유행한 연애열이 내포하고 있는 근대성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당시 신문과 잡지의 삽화와 만화, 광고 등 책에 인용된 80여종이 넘는 시각자료를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연애와 결혼, 가정 등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의 산물이란 사실이다.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당시 이식된 근대의 담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최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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