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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재계 인물현대史 게재 일자 : 2004년 01월 03일(土)
“국익에 투자” 부실 대한항공공사 인수
수송 한국의 巨木, 조중훈(7)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누적 적자가 27억원인 회삽니다. 절대로 인수해서는 안됩니다.”

“월남에서 고생해서 모은 돈을 밑빠진 독에 쏟아붓자는 말씀이십니까.”

1968년 어느 여름날, 서울 반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 10층 한진상사 사장실에서는 대한항공공사의 인수여부를 놓고 임원들이 3시간째 열띤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조중훈은 묵묵부답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다른 조건을 내걸더라도 대한항공공사 인수만은 거절해야 합니다. 거기에 쓸 자금이면 차라리 외국차관을 들여와서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임원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조중훈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들 말이 백번 옳네.” 임원들의 근심어린 눈빛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하지만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또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도 있는 법이네. 한진이 월남에서 번 돈을 국익에 재투자하자는 것 아닌가. 이번 건은 국익 차원에서 이해하고, 자네들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네.”

정말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대한항공공사는 당시 20여개의 국영기업 가운데 가장 큰 적자규모를 기록하며 고전중이었다. 잦은 기체 고장과 결항, 연착 등으로 공신력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보유 항공기는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에 DC-9 제트기 1대가 고작이었다.

좌석수는 8대를 다 합쳐봐야 400여석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는 대한항공공사 민영화 방침을 세운 후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상대로 항공공사를 인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두들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정부가 차선책으로 추진한 외국항공사와의 합작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두차례에 걸친 대한항공공사 공개경쟁입찰은 단 한명의 응찰자도 나서지 않아 자동 무산됐다.

조중훈은 항공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60년에 이미 세스나 비행기로 ‘에어택시(Air Taxi)’ 사업을 시작했고 5·16 쿠데타로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한국항공’ 주식회사까지 차린 경험이 있었다. 언젠가 항공사업을 통해 육·해·공이 삼위일체가 된 수송기업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숨겨진 꿈이었다. 정부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마지막 카드로 그를 지목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자투성이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는 것은 그로서도 큰 모험이었다. 월남전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중견기업에서 자본금 1000억원대의 대기업으로 발돋움한 한진은 67년 7월에 ‘대진해운’을 세웠고 같은해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5억7000만원에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68년 3월에는 이병철 삼성그룹회장과 조홍제 효성그룹회장이 공동 소유하고 있던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부지를 사들여 최초의 사옥인 한진빌딩 공사에 착수했다. 조중훈의 다음 계획은 해운사업 분야를 확장하는 것이었지 부실 덩어리인 국영 항공공사를 인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거듭된 부탁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조중훈을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게 아니겠소.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

서슬퍼런 당대 절대권력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국적기를 타보고 싶다는 대통령의 바람을 조중훈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1968년 11월 1일, 납입자본금 15억원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고 부채는 그대로 떠안는 조건으로 정부에 대한항공공사 인수 의사를 통보했다. 부실회사를 인수하는 조건으로는 턱없이 불리했지만 일단 맡기로 한 이상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이 조중훈의 스타일이었다.

1969년 2월 28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조중훈은 사장에 선임됐고, 3월 6일에는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을 열었다. 이것이 오늘날 항공기 보유대수 118대, 화물수송부문 세계 3위, 항공여객수송부문 세계 15위 항공사로 우뚝선 ‘주식회사 대한항공’의 험난한 첫 출발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인수를 해놓고 보니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죠.”

한진 황창학 고문은 “조 회장께서는 대한항공공사 인수 초기에 회사를 정상화시킬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일하는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너무 많은 역피라미드식 조직이었다.

이런저런 ‘빽(인맥)’으로 채용된 직원이 절반 이상이었다. 심지어 이름만 걸어놓고 출근부 도장만 찍는 유령 직원까지 있었다. 황 고문은 “당시 실무선에서는 감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조 회장께서는 ‘못쓸 사람은 못쓰는 대로 쓸만한 사람은 쓸만한 대로 쓰겠다’며 단 한 사람도 자르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쫓겨나면 본인이 망신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어려워질 테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면 자리를 바꿔주거나 교육을 시키면 된다’는 게 조중훈식 탕평책이었다. 조중훈은 오히려 한진 직원들의 60% 정도에 불과했던 대한항공공사 직원들의 임금을 올려 급여를 상향평준화했다.

회사 주인이 바뀌면서 불안감에 휩싸인 직원들을 다독거리기 위해서였다. 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성과급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매일 정해진 승객수 이상을 수송하게 되면 인센티브를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기업은 인간이 만들고 조직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위치가 있는 법이며 그것을 알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조중훈은 후일 회고록에서 “‘기업은 곧 인간이며 중요한 것은 인화(人和)’라는 믿음이 나의 소신이자 경영철학”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조중훈은 인력 감축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대신 과감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1969년 2월 주식회사 대한항공 사장 취임 일성으로 주주총회에서 “앞으로 기종의 증가는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 좋은 4발 제트기로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의 선진 항공사들이 대형 제트기로 치열한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무리가 따른다 하더라도 대한항공이 살아남을 길은 짧은 시일에 최대의 수송 능력을 갖추는 것뿐이란 판단에서였다. 조중훈은 우선 국내선용으로 2년만에 신형 YS-11기 8대를 도입했다. 오로지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다음으로 그는 국제선 항로 확보 작업에 착수했다. 외화를 벌어들여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항공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국제선 노선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항로는 비행기와 수요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라의 하늘길이라 해도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빼앗기거나 국가와 국가간의 외교 문제 때문에 막히는 일이 허다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놓고 하늘은 이미 세계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있었다.

1969년 당시 대한항공이 그나마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던 국제선은 서울~도쿄(東京), 서울~오사카(大阪)노선과 부산~후쿠오카(福岡) 노선이 고작이었다. 국력 과시 차원에서라도 꼭 취항해야 했던 미주노선은 한·미 항공협정에 따라 한국 항공사에는 알래스카를 경유해 시애틀까지 가는 북태평양 노선만으로 제한돼 있었다. 한국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호놀룰루나 로스앤젤레스 등 중부 태평양 노선에는 운항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중동으로 가는 교두보가 될 서울~방콕 노선이나 동남아 진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서울~마닐라 노선, 한국 건설업체나 용역업체들이 수시로 이용하고 있는 서울~사이공 노선도 취항이 안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1969년 2월, 조중훈은 일단 서울~사이공 노선에 B 720 여객기를 취항시켰다. 협정을 맺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우선 ‘착륙 허가’만 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다행히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병력과 근로자 수송을 위해 취항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한항공의 운항을 제재하지 않았다. 같은해 10월에는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했다. 앞으로 동남아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란 예측에서였다.

조금씩 취항 항로를 늘려가면서 대한항공은 서서히 국적 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주노선이 문제였다. 미주노선에 취항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 항공협정부터 개정해야 했지만 미국측은 아예 협상 테이블에조차 나오려 하지 않았다.

조중훈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동시에 1970년 11월 로스앤젤레스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 영업소를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집요하게 설득하는 조중훈에게 미국 정부는 1971년 1월 결국 미주 노선 취항을 허락하기에 이른다. 대한항공 출범 2년 만에 마침내 태평양 상공의 하늘길이 뚫린 것이다. 〈계속〉

노윤정기자 prufrock@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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