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환경개조는 ‘문화적 진화’

“우리 주변에서 기고, 날고, 땅속을 파고, 헤엄을 치는 뭇 동물들 가운데서 인간만이 자기 환경에 갇혀 있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상상력, 이성, 정서적 예민성과 강인성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인간이 일련의 발명을 통해 자기 환경을 개조해 온 것은 일종의 다른 종류의 진화, 즉 생물학적인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인 것이다. 나는 그 눈부신 문화적 산봉우리의 연속을 ‘인간의 등정(The Ascent of Man)’이라 부른다.”

책은 수학과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일 뿐만아니라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권위자이기도 했던 저자(1908~74)가 죽기 1년전 완성한 마지막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마지막 프로젝트란 1973년 BBC를 통해 방영된 13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쓰고 해설했던 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됐던 이 프로그램은 같은 해 책으로 출간돼 상당기간 베스트셀러가 됐다.

폴란드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의 점령을 피해 가족을 따라 영국에 귀화했던 저자는 제목이 찰스 다윈의 저서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를 떠올리게 하는 책에서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모두 13장으로 구성된 책은 아프리카 적도 남쪽 타웅에서 발견된 2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이의 두개골에서 시작해,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마추픽추와 고딕성당, 연금술과 원자론,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뉴턴과 아인슈타인, 산업혁명, 다윈과 월리스, 양자물리학과 유전공학에 이르는 인간 지성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 올라간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모두 정통해 ‘20세기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았던 저자의 작품인만큼 책은 출간된지 3년이 지난 1976년 국내에서도 ‘인간역사’(삼성문화문고 79)란 제목으로 축약번역판이 나왔고 프로그램도 KBS에서 박성래(과학사)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해설을 붙여 여러차례 방영된 바 있다. 천연사진이 흑백사진으로 바뀌고 몇 개의 도판이 빠지기는 했지만 재미작가인 김은국씨의 번역으로 완역판(범우사)이 출간된 것이 1985년이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바로 19년전 번역본의 개정판으로 220여 개에 이르는 원서의 도판을 온전히 되살리고 당시 김은국씨의 번역을 도왔던 김현숙(영문학) 수원대 교수가 다시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을 손질했다. 여기에 송상용(과학사) 한양대 석좌교수의 감수를 거쳐 일종의 완전판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설명이다.

책은 과학기술이 날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한 세대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전혀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을 공부하던 학창시절 진보적인 문예잡지 ‘실험’을 발간하고 시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의 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글쓰기 능력과 다른 과학사 책들과는 다른 현대판 ‘자연의 철학’을 제시하겠다는 포부가 책의 서술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은 과학사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의 과학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란 영역을 뛰어넘어 예술과 문학, 종교, 기술, 건축 등 문화적 진화 일반을 아우르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알타미라의 동굴벽화에서 인간만이 가진 선견력을 확인한 저자는 부싯돌에서 기하학에 이르고, 건축물의 아치에서 상대성 이론에 이르는 발명과 발견이 결국 자연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이제는 문화적 화석이 되어버린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북단 랩족의 이동생활을 통해 본 빙하시대를 이겨온 인간의 지혜와 고대 예리코의 오아시스에서 잡종 밀의 개량이 가져다준 농업혁명의 폭발적인 변화, 말의 가축화가 유목경제에 미친 영향,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서 꽃핀 잉카문명이 신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세계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차이, 연금술로부터 시작된 현대과학의 발전과정 등이 설득력 있게 제시돼 독자들에게 인류의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최영창기자yc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