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폴리에스테르 필름’ 자체개발로 성장 발판

“사장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김창호가 도착했습니다.”

최종현은 ‘김창호’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종건이 눈을 감기 한 달 전부터 한국경제는 제1차 오일쇼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두 달 사이에 원유 가격이 4배로 치솟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대한석유공사,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등 한국의 정유 3사에 원유 공급을 줄이겠다고 통보하면서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김종필 총리를 포함한 민관사절단이 사우디아라비아로 급파됐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최종현은 포기하지 않고 사절단의 선경측 실무자였던 김창호(전 SK유통사장)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남겨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도록 지시했다.

“OPEC은 아랍에 비우호적인 국가에는 절대로 석유를 줄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우리나라도 비우호 국가로 분류돼 있습니다. 수출금지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단교하고, 친 아랍국가임을 공표해야 한답니다. 한국의 일간신문에 이런 내용이 크게 보도되면 믿겠다고 합니다.”

공항에서 곧장 빈소로 달려온 김창호는 사우디아라비아 고위 관계자가 제시한 선행 조건을 최종현에게 그대로 전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얘기를 듣고 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과의 단교는 외교적인 문제였다. 또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을 보내면서 형이 못다 이룬 석유사업에 대한 꿈을 가슴에 묻은 최종현은 1973년11월24일 선경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장 정부 관계자를 찾아 수출금지를 풀 수 있는 선행조건을 전했다. 경제 파탄의 위기에 몰린 정부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차례 문구를 수정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정부는 마침내 친아랍국가임을 선언했다. 신문들은 일제히 이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며칠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원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이 한국을 향해 고동을 울렸다.

김창호 전 SK유통 사장은 “남들은 모두 안된다고 포기했지만 최종현 회장은 오랫동안 뜸을 들이면서 차근차근 추진했다”며 “정유사업 진출도 이 때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신뢰와 우정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수출금지 해제로 석유공급이 중단되는 최악의 위기는 넘겼지만 오일쇼크는 세계경제와 함께 한국경제를 강타했다. 1974년 한해 동안 모든 원자재 가격이 치솟았고, 석유화학 원료는 2배 이상 폭등했다. 선경도 이 소용돌이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최종현은 일단 수출에 주력하는 한편 선경의 재무구조 건실화를 위해 주력 기업에 대한 대규모 증자를 단행했다. 그리고 1975년 신년사에서 ‘제2의 창업선언’으로 불리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한다.

“나는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제는 석유에서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시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제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입니다.”

최종현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완전 계열화’가 하드웨어의 완성이라면 ‘경영능력의 배양’은 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의 정립이었다.

이 무렵, 최종현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했던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 계획을 꺼내놓는다. 폴리에스테르 필름은 컴퓨터와 오디오의 자기테이프, 마이크로필름 등으로 쓰이는 기초소재였다. 세계 수요는 매년 20% 가까이 급증했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수요도 폭증하고 있었다.

당초 최종현은 외국의 기술 도입을 추진했었다. 당시 폴리에스테르 필름의 제조기술은 미국의 듀폰을 비롯한 4개국 7개사가 과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술 이전 요청을 한결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최종현은 마지막으로 선경에 섬유제조기술을 제공했던 일본의 데이진을 찾았지만 역시 냉대를 당했다. 수익성이 높은 독점 기술을 쉽게 내놓지 않으려는 외국기업의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최종현이 독자 개발 방침을 밝히자 이번에는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개발팀에서조차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시장성이 있는 12㎛ 이하 제품은 생산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국제시장에서 일본 제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도 의문입니다. 결국 막대한 연구비만 날리고, 회사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현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기술 선전국이 용도 폐기한 기술을 비싸게 사들이며 그들의 뒤만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종현은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선경의 저력을 믿는다”는 말로 반대를 일축했다.

선경합섬은 1975년 1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의뢰한다. 이듬해 9월에는 제조기술의 핵심 노하우인 칩(Chip) 개발을 KIST측이 맡고, 선경측은 제품화 기술을 개발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과 합작기업이던 선경합섬은 독자기술 개발에 난점이 있었다. 이에 최종현은 선경석유의 사명을 선경화학으로 바꾸고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을 담당하게 했다.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기술 개발에 착수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개발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당시 제품화 기술 개발에 참여한 민병길 선경화학 수원공장 관리부장은 ‘선경사보’ 1993년 4월호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새벽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일은 계속 되었고, 우리는 이런 생활을 올빼미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드디어 공장이 건설되고 설비가 가동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주위에 쌓이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폐 필름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이는 폐 필름의 양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공장 건물보다 더 커져 외부에서는 공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경영실적마저도 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해 회사는 존립의 위협까지 느끼게 됐고, 사원들의 임금이 제때 지급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선경은 필름 생산시설에 400억원을 투자했다. 서울 퇴계로2가 극동빌딩 14층 선경합섬 부사장실에서는 연일 자금 대책회의가 열렸다. 계열 기업 자금 담당 임원과 부장들이 모여 하루하루 쫓기는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막판에는 월 4%에 달하는 고리의 사채시장 자금까지 동원됐다.

1977년 4월 선경화학은 마침내 압력을 가해 필름을 뽑아내는 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9월에는 완제품 시험에도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선경화학은 1977년 10월 선경합섬 수원공장 남쪽에 9800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연산 900ｔ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필름 생산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 해 12월 폴리에스테르 필름 시제품을 처음 생산하던 날, 선경화학 수원공장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최종현은 필름 개발에 참여한 직원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난관이 최종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경화학이 완제품 시험에 성공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데이진이 한국측 합작회사인 J합섬에 기술을 제공키로 결정한 것이었다. 기술이전의 대가는 560만달러에 달했다.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최종현은 1978년 1월 그동안 비밀에 부쳐왔던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과정과 성공사실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하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관련법에 명시된 국산 기술제품에 대한 보호조치를 정부에 요청했다.

선경화학은 1978년 4월 수원공장을 완공하고, 이어 6월에는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품질은 국제규격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정부도 “선경화학이 개발한 폴리에스테르 필름이 국내에서 개발한 신기술이 확실하며, 경제적 파급 효과가 매우 크다”고 판정했다. 또한 선경화학의 기술을 4년 동안 보호한다는 결정을 덧붙였다. 김항덕 SK그룹 고문은 “폴리에스테르 제품 가운데 필름은 부가가치가 높았고, 당시 비디오 공테이프 개당 가격이 20달러에 달했다”며 “선경화학이 이후 개발한 신기술이 많았지만 최종현 회장은 오래도록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기술 독점권을 인정받은 폴리에스테르 필름은 선경그룹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게 된다. 이를 통해 형성된 자금은 이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등 선경그룹이 성장하는 시드머니(종잣돈)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