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현대史>“글로벌 시대 온다” 中진출 박차

“이쪽으로 오십시오. 장 주석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1994년 3월 9일 오전 9시. 중국 베이징(北京)시 중난하이(中南海) 댜오위타이(釣魚臺) 접견실 앞에서 최종현(전SK그룹회장)은 떨리는 심정으로 공산당 간부의 안내를 받았다. 한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중국 최고지도자와 접견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반갑게 최종현을 맞았다. 장쩌민은 한·중 수교 과정에서 최종현과 SK그룹(당시 선경그룹)이 민간채널 창구로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최종현과의 만남이 이뤄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장쩌민은 한·중 수교에 큰 공헌을 한 최종현의 노고를 치하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외국계 기업의 중국 투자쪽으로 이어졌다.

최종현은 평소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했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은 중국에서 단기간에 이익을 내려고 해선 안 될 것입니다. 길게 보면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지요. 우리는 중국에서 번 돈을 다시 중국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외국이 아니라 확장된 내수시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쩌민은 이 말을 듣고 반색을 했다. 당시는 시장개방정책 시행으로 외국계 기업의 중국 진출이 봇물을 이루고 있던 상황. 그러나 서구 열강 침탈의 뼈아픈 기억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한국의 기업가를 만났던 것이다. 두 사람의 면담은 45분 정도 계속됐다. 하지만 최종현은 당시 최대 현안인 선전(深？b) 정유공장 사업은 주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마음을 사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6년 2월 7일 최종현은 중국의 또다른 실력자인 리펑(李鵬) 총리를 만났다. 장쩌민과의 접견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현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친분이 주가 된 자리였다. 최종현과 리펑의 대화는 당시 한국의 어수선한 정치상황으로 시작됐지만 결국 외국계 기업의 중국 투자쪽으로 귀결됐다. 최종현은 이 자리에서 ▲상호 이해 ▲상호 신뢰 ▲상호 이익 ▲장기적인 전략 등 SK의 기본적인 중국 진출 전략에 대해 설명했다. 또 선전 정유공장 사업 추진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에서 완성한 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중국에서 실현하고 싶다는 포부도 내비쳤다. 리펑과의 만남 이후 최종현은 중국 주재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제 내가 중국에서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유(you)들이 다 알아서 해.”

평소 그의 경영스타일대로 최종현은 세부적인 사업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1년에 한두번 정도 중국을 방문, 사업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뿐 중국 사업 전반은 현지 주재원들에게 모두 맡겼다.

사실 SK는 1992년 8월 24일 이뤄진 한·중 수교에서 큰 공을 세웠다. SK는 1988년부터 2년동안 한·중 수교 준비단계부터 깊이 관여했다. 한국정부는 중국과의 수교를 준비하면서 정부 공식라인과 민간라인을 운용하고 있었다. 민간라인 후보로는 SK와 함께 K, D기업 등이 거론됐으나 중국 정부는 결국 SK를 한국측 민간라인 파트너로 결정했다. 1990년 톈지윈(田紀雲) 당시 중국 부총리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이순석 당시 SK상사 사장을 접견하기도 했다.

민간라인 역할을 한 탓에 SK는 중국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1991년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베이징지사 설립 허가를 받았다. 사업 진출도 빨랐다. SKC는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도 전인 1990년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방된 지역인 푸젠(福建)성에 중국의 중견기업인 인데센(永德信) 그룹과 비디오카세트테이프 합작공장을 세우며 진출했다. 지금까지도 이 공장은 푸젠성에서 가장 모범적인 외자기업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인데센 그룹은 97년부터 SK의 경영이념인 ‘수펙스(SUPEX)’를 도입, 성공을 거둔 뒤 이를 전계열사에 적용하기도 했다.

또 1996년 10월 SK상사는 중국 대외경제무역합작부 산하의 중국기술진출구총공사와 함께 한·중합작 종합무역회사인 중기선경무역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이 역시 한국 업체로선 최초다.

그러나 SK는 중국에서 큰 좌절을 겪게 된다. 일명 ‘심천 프로젝트’였다. 심천 프로젝트는 SK가 1990년대초 중국 선전에 10억달러 규모의 정유단지 건설을 추진했던 사업. 당시 선전시 정부와 의향서(MOU)까지 주고 받았고 중국 정부의 비준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선전시에 정유공장을 짓고 여기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석유화학제품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당시 선전시도 홍콩의 경공업제품 생산기지 역할에서 벗어나 석유와 석유화학 등 중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이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특히 최종현이 장쩌민과 리펑을 잇달아 만나면서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 정부로부터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SK는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에너지·석유화학산업 같은 중공업은 정부가 외국기업의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산업들은 정부 차원에서 국영기업을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SK는 1996년말 몇년간 공들였던 이 사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무실 운영비 등으로 쓴 200만달러는 중국사업에 대한 수업료로 바치기로 한 뒤 깨끗이 포기했다. 중국 사업을 총괄했던 이종수 당시 SK 중국지역본부장은 이에 대해 “결과적으로 보면 이 사업이 중단된 것이 SK로선 다행이었다”고 설명한다. 사업 포기 직후 한국에서 불어닥친 외환위기때문에 대규모 해외투자사업을 벌였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심천 프로젝트 철수 이후 SK의 중국사업은 2~3년간 명맥만 유지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제위기로 휘청거렸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중국이 이 위기를 비켜가는 모습을 보며 중국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중국도 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수출이나 외국인 투자가 줄었지만 넓은 내수시장을 배경으로 영향을 덜 받았던 것이다.

SK는 1999년부터 중국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도 베이징에서 열었다. 그룹 내부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곧바로 구조조정본부 산하에 중국사업팀이 만들어졌다. 김상국 (현 SK중국투자유한공사 총경리)상무 등 10명의 주재원이 베이징으로 떠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다양한 인터넷 벤처사업을 전개했으나, 친구찾기 사이트 ‘비아프렌드’를 제외하곤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김 상무는 “그때 실패는 중국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회장은 지난 10월 중국 사업을 총괄하는 지주회사인 SK중국투자유한공사 설립을 통해 중국시장 진출을 가속화한다.

이것저것 사업이 될 만한 것들을 검토해보고 중국에서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을지 사업모델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각종 인터넷 사업, 벤처 인큐베이팅 사업 등을 추진했지만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당시 개설한 동창생 찾기 인터넷 사이트 ‘비아프렌드’는 중국에서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 전무는 “현재 SK투자유한공사의 가장 큰 목적은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라며 “그때 실패는 이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성장통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현재 SK는 중국에서 생명과학사업, 정보통신사업, 도로·자동차유관사업 등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의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업체인 차이나유니콤과 합작으로 무선인터넷 플랫폼업체 ‘UNISK’를 만들어 공동 운영하고 있고, 베이징에 ‘SK 아이캉(愛康)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 베이징과 상하이(上海) 등에 ‘차이나비전 그룹(CVG)’을 설립해 중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장학퀴즈’의 중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SK 좡위안방(狀元榜)’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SK의 이미지를 각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상무는 “에너지·화학·정보기술 등 SK의 주력사업은 사업 특성상 단기간에 승부를 볼 수 없다”며 “20~30년 길게 보고 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한국, 중국 등 동북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내수시장으로 생각하며 사업을 추진해나가야 한다고 했던 최종현 전 회장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