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지역사회에의 사명’ 항상 머릿속에

지난달 12일 열린 울산 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이두철 회장은 ‘SK주식 사주기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울산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인 SK㈜가 외국계 투기자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다. 회의 참석자 대부분이 이에 즉각 찬성했지만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다. 회의장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한 회의 참석자는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사재라도 털어서 SK㈜ 주식을 사주고 싶다”면서도 “회원사 전체의 이익을 도모해야 할 상의가 특정 기업을 지원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상의에서 한 회원사의 대주주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백기사’ 역할을 맡은 적은 상의 역사상 단 한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이두철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SK 사태는 단순한 SK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기업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제의를 했을 것입니다. 외국 투기 자본의 행태들을 보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기업인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더욱이 SK는 40년동안 울산과 함께한 지역 기업입니다. 실질적인 도움이야 줄 수 없겠지만 분위기를 전환시킬 순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반대는 없었다. 울산 상공회의소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지난달 17일 울산 지역 1000여개 우량업체에 회장단 명의로 SK주식 사주기 동참 공문을 발송했다. 16일에는 울산, 부산, 인천광역시와 상의에 SK주식사주기운동 동참을 요청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특히 SK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수원에서는 지역 기업인, 시민들의 참여가 상상을 초월했다.

울산 지역에서는 남구청, 남구의회 및 울주군, 울주군인회, 소상공인연합회, 여성단체협의회 등이 ‘자발적으로’ 나서 SK주식 매입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수원 상공회의소와 수원 기업인들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들은 경기도청 사거리, 수원역, 수원시청 앞 등 수원시내 10여곳에 ‘수원 향토기업 SK 수원의 힘으로 지킵시다’ ’50년 향토기업 SK에 외국자본 웬 말이냐’등의 내용을 담은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울산과 수원 시민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SK 살리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 대표 기업이 사라지면 지역 경제도 같이 흔들린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SK에 대한 지역사회의 호감도 역시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특정 지역에 회사나 공장을 설립, 고용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소비 진작을 일으켜 지역 경제에 기여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지역자치단체에서 산업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것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한 지역에서 기업이 존경받으려면 여기에 ‘플러스 알파(+α)’가 필요하다. SK는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에 남다른 힘을 쏟았고 지역 주민들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SK살리기에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에 대한 SK의 공헌은 최종현(전 SK그룹 회장)에 연원이 있다.

최종현은 1973년 11월 타계한 최종건의 뒤를 이어 수원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1987년까지 무려 15년동안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수원에 많은 공헌을 한다. 수원상의사(史)는 최종현의 수원 지역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형 최종건(SK그룹 창업주)의 뒤를 이어 수원상공회의소의 얼굴로 등장한 최종현 회장의 참여폭은 엄청났다. 토박이 수원인으로서 보여준 소박한 얼굴중 하나는 1983년 5월 ‘수원장수근로회관’을 세워 수원시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그는 이 시설을 마련하는데 3억6500여만원의 사재를 쾌척했다. 이것은 쇠퇴해가는 경로사상의 발현인 동시에 양친에게 못다한 효도를 살아있는 고로(古老)들에게 돌려주려는 애틋한 애정의 발로였다.’

또 ‘SK수원도서관’은 최종현이 고향에 바치는 ‘대형 선물’이었다.

최종현은 250억원을 들여 1995년 4월 SK수원도서관을 준공, 이 역시 수원시에 기부했다. 대지 3600평, 연면적 2500평에 지상3층, 지하1층의 이 도서관은 수원시에 있는 3개 시립도서관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국내 전체로 따져도 규모면에서 10위권 안에 든다. 모두 1400개의 열람석으로 구성된 이 도서관은 하루 평균 3000여명이 찾을 만큼 수원시 문화생활의 중심축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최종현은 수원지역 일가 친인척들에게 인색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친인척들이 인사 청탁이나 집안 대소사 문제로 찾아오면 아예 만나주질 않았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그의 성격때문이었다. 그러나 SK수원도서관 준공식에는 수원지역 일가 친인척을 모두 초청했다. “고향이나 일가 친인척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고향을 사랑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다소 섭섭한 게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달라”는 뜻이었다.

손재택 SK아카데미 상무(전 SK그룹 비서실장)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10여년간 최종현 회장을 모셨지만 그날처럼 기쁨에 겨워 들떠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부채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도서관 준공을 통해 그 부채를 덜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SK수원도서관 설립으로 인해 수원 지역에서 SK의 기업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다. 최근 SK주식 사주기 운동에 수원 시민들이 적극 동참하게 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울산은 최종현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SK가 울산과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은 지난 1968년 울산 지역에 직물공장을 설립하면서부터. 이어 1974년에는 폴리에스터선(線) 공장을 건립했다. 그러나 울산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80년 유공(현 SK㈜)인수 이후다. 현재 SK㈜의 거의 모든 생산설비가 울산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최종현은 1년에 서너차례 울산을 찾았다. 유공 인수를 통해 평생의 꿈인 ‘섬유에서 석유까지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한 그에게 SK 산업단지는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최종현은 울산 시민들에게 큰 선물을 준비한다. 1995년 11월 심완구 당시 울산광역시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울산대공원 조성을 약속한다. 울산대공원은 울산 광역시 중심부인 남구 신정동·옥동 일원 110만평 규모의 공원지구에 시설면적기준으로 모두 24만평 규모로 조성되는 대규모 위락시설. SK는 이를 위해 97년부터 오는 2006년까지 1000억원을 투입한다. 울산광역시는 부지 매입에만 288억원을 썼을 뿐이다.

599억원을 투입해 지난 2002년 4월 1차 조성시설(시설면적기준 13만평)을 개장했다. 또 오는 2006년 완공 예정으로 지난 5월 2차 조성시설(11만평) 착공식을 가졌다.

이날 2차 기공식에서 박맹우 울산시장은 “비록 지금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울산대공원이 탄생할 수 있도록 진력을 다해주신 고 최종현 회장님의 울산사랑과 시민을 생각하는 고마운 마음을 다시금 되새긴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기념사를 했다.

“오늘의 SK가 있기까지 지난 40년간 따뜻한 둥지가 돼준 울산에 늘 감사해왔습니다. 특히 지난해 울산 시민들이 보내준 뜨거운 지지와 격려야말로 SK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SK와 울산은 잡고 있는 서로의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이며 더욱 빛나고 자랑스러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떨렸지만 진심이 배어있었다. 오찬사가 끝난 뒤 울산대공원에 운집한 울산 시민들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렸다.

우리나라 압축성장의 명암을 그대로 안고 있는 도시 울산. 울산대공원 1차 조성 시설이 개장되기 전까지 그 큰 도시에 변변한 공원 하나 없었다. 울산대공원의 설립은 휴식공간에 대한 울산 시민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줬다. 주말만 되면 울산대공원은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2006년 2차 조성시설 개장에 대한 기대감도 충만하다. 비록 최종현은 울산대공원 단 한군데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지 않았지만 울산 시민중 그 누구도 울산대공원이 최종현과 SK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