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전경련 이끌며 국가경쟁력 강화 헌신

최근 한국 재계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선임을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그러나 20년 전인 1985년 1월 상황은 달랐다. 당시 재계는 1977년부터 8년 동안 전경련을 이끌며 속시원히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정주영(전 현대명예회장)회장의 연임에 이견이 없었다. 반면 군사정권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 회장을 밀어내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 무렵 최종현(전 SK그룹회장)은 회장실에서 청와대 관계자의 방문을 받는다.

청와대가 나서 주요 그룹 회장들을 찾아다니며 정 회장의 교체를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현은 일언지하에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요청을 거부했다. “전경련 회장은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원들이 결정하는 것이죠.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청와대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재계의 목소리를 모아야 할 전경련 회장을 청와대가 선출한다면 전경련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결국 2월에 열린 회장단 회의에서 정 회장이 재추대됐다. 1987년에는 구자경 LG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았고, 1989년에는 유창순 회장이 뒤를 이었다. 1991년에 이르자 최종현을 추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최종현은 극구 고사했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일본 게이단롄(經團連)의 경우를 보더라도 연륜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라는 점이 실제 이유였다.

최종현은 1987년 2월부터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고 있었다. 사업가 이전에 학자가 꿈이었던 그는 여기서 세계경제의 흐름과 한국경제의 현안들을 놓고 학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1993년 2월 다시 전경련 회장에 추대됐을 때 최종현은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이제 전경련은 대기업의 이익이나 대변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자율·창의·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 경제를 정상적으로 키우고, 나라를 살찌우는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경련 활동에 무관심해 보였던 최종현은 취임사를 통해 전경련에 대한 개혁 의지를 밝히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최종현은 같은해 3월 회장단 회의를 거쳐 ‘자율조정위원회’를 설치했다. 기업간의 사업 마찰, 기업과 소비자 분쟁 등을 재계가 자율 조정함으로써 신뢰받는 기업상을 구축하자는 의도였다. 동시에 30대 그룹 기획조정 책임자가 참여하는 ‘기조실장회의’를 발족시켰다. 여기서 실무적 사안을 다루고, 회장단회의에서는 중요 정책과 국가적 과제를 다루도록 역할을 부담함으로써 전문경영인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전경련 운영에 반영되도록 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최종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국가 경쟁력 강화였다. 국내외 경제동향에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었던 최종현은 당시 상황을 중요한 전환기로 인식했다. 국경없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종현은 기업 경쟁력이 아닌 국가경쟁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힘을 모아야 했고, 정부의 지원도 필요했다. 1993년 10월 최종현의 주창으로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국가경쟁력강화민간위원회’가 발족했다. 첫 회의에서 최종현이 밝힌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고임금·고금리 등 고비용 체제와 저효율·저생산성이라는 경제구조 아래서는 경제 활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산업은 수출시장뿐만 아니라 국내시장에서도 선진국과 후발 개도국의 틈바구니에서 버티는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냉혹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수건 수출이건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 외엔 대안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야말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대명제 앞에서 그저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보다는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민간 경제계가 앞장서야 할 때입니다.”

경쟁력강화위원회의에는 산하기구로 업종별경쟁력강화분과, 사회간접자본확충분과, 수출촉진분과, 중소기업경쟁력강화분과, 인력노동분과 등 5개 분과회의와 산업인력특위, 정보화촉진특위, 섬유산업경쟁력강화특위 등 3개 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최종현은 회의를 통해 도출된 실천과제 가운데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관계 당국에 건의하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즉각 실행 프로그램을 수립해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업이 당시 섬유·신발 등 대표적 구조불황업종의 활력 회복을 위해 실시한 ‘대구 섬유연구개발센터’ 건립과 ‘신발산업 설비자동화 설계자금’ 지원이었다. 또 국내 반도체 설계기술의 향상과 전문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반도체회로 설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가경쟁력 강화 사업과 관련된 회의는 처음부터 끝가지 최 회장이 직접 주재했습니다. 각 기업의 실례를 가지고 우리 제품과 선진국 제품이 기술·품질·운송·이윤 등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적인 대안을 도출했죠. 기술력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의 문제,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최종현과 함께 손발을 맞췄던 조규하 당시 전경련 부회장은 “SK그룹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겨 놓고 최 회장은 전경련 사업에 전념했다”며 “그는 기업의 입장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해 나갔다”고 회고했다.

최종현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관계의 질적 개선에도 역점을 두고 다양한 협력 사업을 전개했다. 대·중소기업의 연계가 제품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최종현은 대·중소기업간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제도개선방안을 정부에 건의했고,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기술·경영 지원을 확대했다. 또 대기업과의 부품계열화 촉진, 해외 동반진출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도 강구했다.

이러한 민간 주도의 국가경쟁력 강화사업은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등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국가경쟁력 강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도 국가경쟁력 강화를 최우선 국정지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한 정부 차원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최종현의 전경련 개혁 방안 속에는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제고도 포함돼 있었다. 경제발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주역인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던 것이다. 당시 조규하는 기업 이미지 개선 작업의 일환으로 사회공헌기금 100억원 조성을 최종현에게 제의한다. 5대그룹도 3억원씩 내라고 하면 반발이 심했고, 10억원 모금도 쉽지 않을 때였다.

“100억원 가지고 되겠어요. 1조원은 돼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건의했지만 예상치 못한 최종현의 답변에 조규하는 당황했다. 100억원 모금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1조원은 도저히 거둬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들이 당장 세금 내기도 어려운 판인데 어떻게 1조원을 내라고 하겠습니까?”

“돈은 벌면 되지 않습니까.”

최종현은 설명은 연간 2000억원씩 5년 동안 모금하면 1조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업들이 비공식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양성화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특히 전경련에서 공식적으로 기부금을 관리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모금하고, 계획을 세워서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사회공헌기금 1조원 조성은 실제 추진됐다. 그것은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당시 최종현은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대학의 경쟁력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기업이 기술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대학의 기초 연구능력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10위권내의 대학을 키우고, 100위권내에는 3~4개가 포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업의 결과는 당초 의도와는 달랐다.

“모금 과정에서 사업의 주체가 전경련에서 청와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대학 총장들은 청와대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금액은 많아야 100억원 수준이었습니다. 대부분 건물을 짓는데 사용됐죠. 그래서 각 대학에 대기업 이름이 들어간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최 회장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최 회장은 세계 일류대학을 육성하기 위한 청사진을 갖고 이를 위해 체계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려고 했습니다.”(조규하 부회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