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임직원에 패기 심으려 ‘氣연구’ 심취

“아버지는 화학과(서울대 농대)를 나오셔서 그랬는지 음식을 화학적으로 접근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먹으면서 계속 연구하고 실험하는 식이었죠. 육개장 하나를 먹어도 ‘육개장이라는 음식은…’ 하면서 육개장의 기원에서부터 지역별 특성, 조리법 등에 대해 한참을 강의하시곤 했습니다. 국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죠” (최태원 SK㈜회장).

천성이 학자여서 그랬을까. 최종현(전 SK그룹회장)은 이리저리 분석하고, 궁리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했다. 가령 고기를 구워도 어느 부위를, 어떤 불에 어떤 방향으로 익혀야 맛있는지, 고기 결은 어떻게 써는 게 가장 맛있는지, 간단한 요리라도 연구하고 또 실험했다. 생선을 구울 때에는 너무 세지 않은 불에 은근히 속까지 잘 구워야 하고, 고기를 구울 때에는 반대로 불이 훨훨 타오를 때 석쇠에 얹어 살짝 구워야 한다는 등 나름의 원칙이 분명했다.

싫어하는 일은 대충 넘어갔지만, 좋아하는 일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그런 성격이었다.

형 최종건(SK그룹창업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SK그룹(당시는 선경그룹)을 떠맡은 지 10년도 안돼 독창적인 경영기법인 경영관리체계(SKMS) 이론을 정립한 것이나, 말년에 기(氣) 수련을 집대성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디자인하우스 펴냄)를 저술한 것 등은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최종현의 과학적 성격이 낳은 산물이었다.

“일이든 놀이든 그 이치를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원리와 이치를 모르고 하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평생을 연구하고 심취했던 기 수련도 이런 지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최 회장이 기 수련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SK맨십’(SK-MANSHIP) 때문이었습니다. SK맨십은 SKMS를 운영하는 주체인 SK 임직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SK맨십의 첫째 요소가 바로 패기(覇氣)입니다. 패기는 영어로 번역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직원들의 체질 속에 어떻게 패기를 심고, 이를 키워 나가도록 할 것인가. 최 회장은 고민 끝에 패기를 논하려면 먼저 기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기 수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원장).

기에 관심을 가진 최종현은 기를 안다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고, 단전호흡에 관한 전문서적도 읽어봤다. 책에 적힌 동작을 따라해봤지만, 도무지 기를 느낄 수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최종현은 이왕 시작한 일, 철저히 알아보자는 뜻에서 손길승 당시 경영기획실장에게 기 수련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토록 지시했다.

“손길승 실장은 당시 유명하다는 단전호흡 단체 몇 곳을 골라, 직원들을 나누어 보내 각각의 수련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손 실장 자신도 그 가운데 한곳에 다니며 직접 기 수련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손 실장이 기 수련에 흠뻑 빠졌다는 소문이 그룹내에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궁금증이 커진 최 회장이 ‘어땠느냐’고 묻자 손 실장은 ‘회장님도 직접 한번 체험해 보시는 게 좋다’고 권해서 기 수련을 시작한게 된 것입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원장).

1986년 여름의 일이었다. 최종현은 그때부터 매일 오전 기 수련을 시작했다. 기의 실체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된 그는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읽은 내용을 실험하고, 또 연구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의문이 생기면, 사람에 의존하기보다 관련 서적에 더 의존하는 게 최종현의 버릇이었다. 그는 이후 기 수련을 꾸준히 수행, 나름의 이론을 정립했고 이를 임직원들의 체력관리법으로 활용했다. 1990년에는 그룹 연수원에서 본격적으로 직장인들에게 걸맞은 건강관리법이 개발됐고, 1993년에는 그가 직접 정리한 ‘심신수련-초급편’이라는 책자가 사내용으로 발간됐다. 그는 말년에 암과 싸우면서도 기 수련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집필 활동을 계속해나갔다(SK그룹은 사후에 그의 육필원고들을 모아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는 심기신수련(心氣身修練) 책을 발간했다).

따지고 분석하는 그의 성격은 부인 박계희씨(1997년 작고)와의 연애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시카고대 유학시절, 최 회장이 부인 박계희씨와 사귀면서 나는 그에게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를 끝내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으레 “뭐하냐”며 내 방에 들어와선 그녀와의 데이트에 대해서 숨김없이 들려준 다음에는 “너 한번 애널라이즈(분석) 해보라”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가 몹시 기분 좋은 데이트를 했을 때에는 기뻐서 시간이 길어졌고, 언짢게 헤어졌을 때에는 언짢아서 길어지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뭣이든 분석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마치 복잡한 경제이론을 분석해 나가듯 데이트의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해석해 나가면서 시원한 해답을 얻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최종현과 유학시절 룸메이트로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홍사중 전 조선일보 고문이 ‘나는 한없이 살았다’(살림 펴냄)에서 밝힌 최종현의 연애시절 일화중 일부다. 그의 이런 성격은 당시 그가 몸담았던 시카고 학파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의 은사이자 시카고 학파의 대부였던 밀턴 프리드먼 교수(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주무기이자 특기는 분석하는 것이었고, 최종현은 그런 프리드먼 교수의 정밀한 분석력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고와 분석적 접근은 ‘경영자 최종현’과 ‘인간 최종현’의 중요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키워드다. 그는 경영에서나 사생활에서 이런 기본 틀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다. 멀쩡한 양력을 놔두고 음력을 따로 따지는 일이라든지, 점집을 찾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며 못마땅해하곤 했다.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집터라는 얘기가 나돌았던 워커힐 빌라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최 회장이 살던 워커힐 구내에 있는 독립건물은 나같은 풍수학인이 보기에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곳이었습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매우 문제가 많은 곳이었기에 직·간접적으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것을 여러번 권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인데, 어찌 사람의 기가 땅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최창조 전 서울대교수, 풍수지리학자).

상식적으로 집터가 안좋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찜찜해서라도 집을 옮겼을 법한데, 최종현은 “집이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며,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 정도로 밖에는 생각지 않는다”며 껄껄 웃어넘겼다.

매사에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실험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부인 박씨가 애를 먹은 경우도 있었다. 바로 김치 때문이었다. 음식과 요리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최종현은 특히 김치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일 좋은 김치는 며칠이 지나서 어떤 배추 상태에서 발효해야 된다고까지 분석했다. 오죽했으면 워커힐호텔 안에 연구소까지 만들어 수펙스(SUPEX) 김치를 개발할 정도였다. 그는 김치 하나를 만들어도 그냥 ‘뛰어난(Excellent)’ 정도로는 성이 안찼고, ‘슈퍼급으로 뛰어나야(Super Excellent)’ 했다.

부인 박씨가 까다로운 남편의 ‘김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씨는 최종현과 결혼하고 나서부터 김치와 씨름을 해야 했다. 생전 안해본 김치를 담그느라 유학시절부터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얼마나 김치를 많이 담가봤으면 김치를 담근 후 양념에 절어 아린 손을 푸는 데는 콜드크림을 바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까지 며느리들에게 했을까.

이렇게 평생을 과학적 사고에 매달려온 그였지만, 기 수련에 심취하면서부터는 동양적 사상에 새로 눈을 뜨게 된다. 기 수련에 관한 그의 마지막 육필원고를 보면 중간중간 동양적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흔히 과학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는 줄로 알기 쉬우나, 실제로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무척 많다’느니, ‘분석적인 방법론으로 마음과 몸의 합일체인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등의 구절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최종현은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담담하게 피력한다.

“한번 태어났다 죽는 것은 생물이면 다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죽음에 대해서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가질 수 있는 수련을 함으로써 고통을 받지 않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연신환허’ 속에 깃들어 있다. 누군가를 가리켜 ‘도통한 사람’이라고 할 때는 제대로 죽을 줄도 안다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