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신입사원 국내 첫 해외연수로 패기훈련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은 1975년 이후 유고 직전까지 매년 신입사원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 전통은 손길승 회장을 거쳐 최태원 회장에게 이어지고 있다.

“회장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경영자이시고 소위 ‘재벌’이십니다. 현재 갖고 있는 돈이 얼마입니까.” 1992년 2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쉐라톤워커힐호텔 선경연수원(현 SK아카데미) 신입사원 교육 현장. 한 신입사원이 최종현(전 SK그룹 회장) 면전에서 ‘당돌한’ 질문을 했다. 배석한 SK 임원진은 바짝 긴장했다. ‘너무 노골적인 질문 아닌가’라는 탄식이 한 임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신입사원들도 술렁거렸다. 참석자 전원의 눈은 최종현에게 쏠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최종현은 지갑을 꺼내보였다. 그리고 입을 뗐다. “나는 돈 한푼 없어요. 집도 없이 전세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다만 회사가 부자일 뿐이죠.” 재벌에 대해 막연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던 신입사원들은 최종현의 이런 솔직한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최종현은 직원 복지후생 수준을 강화해달라는 한 신입사원의 건의를 듣고 ‘그렇게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최종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길승 당시 경영기획실장(전 SK그룹 회장)은 최종현의 지시에 ‘안된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최종현은 이 문제에 대한 즉석 토론을 제의했고, 곧바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신입사원들에게는 이런 상황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회장의 지시에 대해 곧바로 문제를 제기하는 임원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런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는 최종현의 태도는 ‘재벌회사라면 당연히 상명하복식 수직적 구조일 것’으로 생각했던 신입사원들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SK그룹 신입사원 교육중 ‘회장과의 대화’에선 버젓이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다. SK그룹의 신입사원 교육은 이렇듯 개방적이고 격의가 없다. 이같은 전통은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최종현의 ‘열린 사고’가 없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예술경영, 인재경영의 대명사로 불렸던 일본 마쓰시타(松下)전기회사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평소 사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기업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업은 원칙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최종현 역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못지않게 인재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이를 적극 실천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6·25전쟁을 겪은 후 잿더미에서 기업을 일으킨 형 최종건(SK그룹 창업주)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최종건은 늘 ‘사람부자’가 ‘돈부자’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기업인이었다. 최종현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인재등용과 이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종현은 1975년 9월 임직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한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인적 요소는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성패는 사람을 잘 다루느냐 못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업을 경영하기 위해 경영의 기법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는 주체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사원들을 남보다 더 유능한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육성해야 하고 또한 이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198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강연에서도 최종현은 신입사원 교육을 포함, 사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80년대에는 경영을 얼마나 충실히 하고 또 누가 경영을 잘 하느냐에 따라 그 회사의 흥망이 달려있다고 봅니다. 알찬 경영을 위해선 무엇보다 경영을 잘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키워놓은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것보다는 자기 기업의 사람을 자기 기업내에서 스스로 키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사람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회사가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획성있게 사원을 교육하는 게 중요합니다.”

㈜선경(현 SK네트웍스)이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신입사원들을 해외로 전지훈련시킨 것도 이같은 최종현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1988년 4월 ㈜선경은 신입사원 107명을 대상으로 9박10일 일정의 일본 전지훈련을 보내게 된다. ㈜선경의 신입사원 일본 전지훈련은 당시 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던 ‘사건’이었다. 부산∼시모노세키(下關)간 페리를 통해 일본에 들어간 신입사원들은 2인1조가 돼 10일동안 일본의 문물을 몸으로 배우며 종합상사맨으로서의 국제적 안목과 패기를 기르고 돌아왔다.

㈜선경이 신입사원들에게 ‘일과 싸워 이긴다’는 ‘패기’를 심어주기 위해 일본 전지훈련을 보내자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이를 보도했다. 이듬해 ㈜선경과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신입사원 243명은 중국을 비롯해 일본과 동남아시아 6개국에서 ‘해외전지 패기훈련’을 가졌다. 이 역시 국내 최초다. 신입사원 교육에 대한 관심과 투자 의지가 없는 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입사원 교육에 참가한 선경종합건설(현 SK건설)의 한 직원은 1983년 당시 SK의 신입사원 교육에 대해 사보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입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교육방법(패기훈련, 이익관리 게임) 등은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일정한 집단사회의 소속원이 돼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데 그 짧은 연수기간에 우리들은 한 식구라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됐다.”

최종현은 직원 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선경 경영자질 향상 5개년 계획’을 세워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1975년에 설립된 ‘선경연수원’(현 SK아카데미)은 그 계획의 심장부 역할을 맡게 된다. 선경연수원은 국내 최초의 기업 연수시설이다. 원래 쉐라톤 워커힐호텔 안에 있다가 지난 1998년 명칭을 변경하고 지금의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신입사원 교육에 관한 한 SK그룹은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밀하다. SK 신입사원은 의무적으로 SK아카데미에서 10박11일 과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신입사원들은 이곳에서 SK의 역사와 문화, SK 기업경영, SKMS(SK경영관리시스템) 연구, SK의 인적 자원 관리 등에 대해 집중 교육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신입사원들이 꼭 거쳐야 할 ‘악명 높은’ 코스가 산악패기훈련이다. 경기도 이천의 설봉산과 왕배산을 오르는 체력단련이지만 그리 간단치 않다. 10여명씩 가상의 회사를 구성케 한 뒤 산행을 하면서 재료를 구입해 물건을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파는 시장경제시스템을 익히게 한다. 산행을 마친 뒤 돈을 가장 많이 번 팀이 1등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체력단련 과정에 아이디어를 도입, 시장경제시스템을 직접 체험케 하는 것이다.

SK그룹의 신입사원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는 역시 회장과의 대화. 최종현은 1975년 이후 신입사원 교육 마지막날 마련되는 회장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빠짐없이 참석, 신입사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때로는 열띤 토론이 전개되면서 4시간으로 예정됐던 대화가 9시간을 훌쩍 넘기는 마라톤 토론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회장과의 대화 시간이면 임원들은 늘 가슴이 조마조마해집니다. 신입사원의 입에서 어떤 돌출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식은 땀이 나는 질문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현 회장은 단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떤 질문이 나와도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사윗감을 회사내에서 고를 의향이 없느냐’는 한 신입사원의 질문에 최회장은 껄껄 웃으며 ‘유(you)들이 도전해봐라’고 가볍게 넘기기도 했습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

회장과 신입사원간에 격의없는 대화를 하는 전통은 최종현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최태원 현 SK㈜ 회장 역시 신입사원과의 대화 프로그램을 중요시한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신입사원들에게 자신의 경영 철학, 향후 경영 방침, 자신이 생각하는 SK의 장단점 등을 털어놓았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도 최대한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테니스 실력이 아마추어 중에서 최고일 것’ ‘한창때는 술을 왕창 마시기도 했다’ ‘일본 만화 초밥왕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등 언론에 알려져 있는 최태원 회장 개인에 대한 정보는 대개 이 자리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은 “SK식 인력개발의 포인트는 ‘직원’이 아닌 ‘경영자’를 키운다는 데 맞춰져 있다”며 “최종현 회장은 신입사원들이 SK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