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노사는 운명공동체” 한솥밥 식구론 주창

최종현(전 SK그룹 회장)은 1년에 한 두번 정도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수원공장을 찾았다.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그의 일정은 비슷했다. 점심은 꼭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했다. 회장이 온다고 해서 특별메뉴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직원들과 점심을 먹은 뒤 노조 간부들과 한 두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최종현은 존칭을 생략한 친근한 말투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곤 했다. “자주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좀 바뻐. 회장을 하니까 바빠서 그랬어. 요즘 어떻게들 지내? 힘든 건 없어?” 한 노조 간부중 하나가 봉급을 올려달라고 했다. 직원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얘기였다. 최종현은 노조의 요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봉급을 올려달라고? 그건 회장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봉급 인상 문제라면 사장한테 말을 해야지. 사장이 결정하면 난 그대로 따를테니까.” 부드럽지만 원칙을 강조하는 최종현의 말에 노조 간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노조 간부는 “노사간 신뢰감을 깊게 하는 게 경영상의 중요한 과제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최종현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노조나 회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익 극대화야. 노사 화합으로 이익을 극대화해 이를 분배한다는 개념을 모두 이해해야 돼. 화합을 어용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해.”

최종현의 말은 직원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회장이라는 직위에서 나오는 권위도 권위지만 최종현과 노조 사이에 상당히 깊은 신뢰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사 화합의 전통 덕분에 SK그룹은 창립 이후 한번도 노사 분규를 겪지 않은 신화를 창출하게 된다.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약 2년동안 기업들은 노사 분규로 몸살을 앓았다. 갑자기 분출된 민주화의 불길이 노사 분규로 옮아붙은 탓이다. 특히 대표적인 공장 지역인 울산은 노사 분규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SK그룹 역시 생산 시설 대부분이 울산에 자리잡고 있어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용케도 그 불길을 피해나갈 수 있었다.

선경인더스트리를 제외한 울산 소재 모든 화섬 공장은 극심한 노사 분규로 생산 활동을 거의 중단했었다. 당연히 다른 공장 노동자들에게 선경인더스트리 공장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선경인더스트리 핵심 노조원을 만나 노사 분규를 종용하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초긴장 상태였다. 특별한 이슈가 없더라도 산업계 전반에 워낙 파업 열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노사 분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공장에서 선경인더스트리에 찾아와 노무 관리 비법을 묻기도 했다.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선경인더스트리에는 다른 공장과 달리 노사간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었다는 점이다.

“SK에서는 종업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원, 구성원, 직원 등으로 불렀죠. 최종현 회장도 그러셨습니다. 직급이 아무리 낮아도 연장자라면 사적으로 만났을 때 깍듯이 대하는 게 SK 문화입니다. 다른 회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였습니다.”(안용태 SK고문·당시 선경인더스트리 관리부장)

안용태가 울산에서 관리부장으로 재직할 무렵 최종현이 울산공장을 찾았다. 임원들에게 브리핑을 받던 최종현은 갑자기 안용태에게 “사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나?”라고 물었다.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선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미 비율을 10%에서 40%로 높였고 언제든지 밥을 더 떠먹을 수 있도록 대형 전기밭솥을 식당에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식단가를 높이도록 지시했습니다.”

최종현은 크게 흡족해했다.

“메뉴 개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시오. 식단가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식단은 아닙니다.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면 같은 가격으로도 충분히 좋은 식단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관리 파트의 고객은 사원입니다. 사원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이세요.”

SK그룹의 무분규 신화는 최종현의 ‘인간 위주의 경영’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종현은 1991년 12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주관의 세미나에서 ‘한국자본주의와 산업민주주의’라는 주제 강연에서 노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사문제를 대립관계에서 보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노사는 최대한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공동작업자입니다. 따라서 이익은 노사가 당연히 나눠가져야 합니다. 노사가 화합하고 복리후생에 힘쓸 때 이윤도 극대화됩니다. 한마디로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인 것입니다.”

1988년 1월 김수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장과의 대담에서는 합리적이며 강한 노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저는 노동조합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조가 없거나 약한 업체에는 외부세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고 노사분규가 한번 발생하면 해결하기가 훨씬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노조를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노조의 활동이나 그들의 주장을 십분 존중합니다. 선경그룹이 지난 노사분규사태에서 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앞서 1980년 7월 전경련의 한 강연에서 최종현은 ‘한솥밥 한식구론’을 제안한다.

“기업의 구성원은 평사원, 과장, 부장, 임원 할 것없이 모두 인체의 오장육부와 같이 분리 불가능하며 또한 필요 불가결한 존재이므로 손쉬운 해고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 식구이고 하나의 운명공동체 구성원입니다.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입니다. 누가 더 잘나고 못나고가 없습니다. 그저 일하는 분야가 다를 뿐입니다. 식구끼리 싸우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식구가 합심해 제품을 만들어 싸움은 밖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해야 됩니다.”

최종현은 ‘인간 위주의 경영’‘한솥밥 한식구론’을 바탕으로 능률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서구의 경영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한 신문에 쓴 노사관련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서구적 기업경영의 단순이론은 기업가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올리려는 능률 제일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얼른 보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능률 제일주의는 자칫하면 경영의 비인간화를 가져온다. 좋은 원천을 통해 양질의 자금을 구하고 싼 이자를 지불하거나 좋은 토지를 구해서 임차료를 싸게 지불하듯이 사람도 물건 다루듯해서 인건비를 가장 싸게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근본적인 저항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기업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최종현은 노사 화합의 처방전으로 특별 보너스 제도를 강조했다.

특별 보너스 제도가 정착돼 있으면 노조도 이를 의식, 파업이나 태업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많은 기업에서 2% 내지 3%의 임금인상폭을 놓고 싸우다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게 되는데 특별 보너스 제도가 확립돼 있는 기업이라면 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파업을 하면 경영진이나 주주뿐 아니라 노조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 그보다는 회사 이익을 증대하는데 합심해 연말에 100% 내지 200%의 특별 보너스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 파업이나 태업을 자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종현은 “특별보너스가 100% 지급되면 8%가 넘는 임금 상승 효과가 나타나며 이익이 더 많이 나서 200%를 지급하면 16%가 넘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노조가 굳이 싸워서 얻어내려 하지 않게 되고, 동반자 관계에서 서로 합심한다면 회사의 이익이 늘어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빵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됨은 자명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최종현이 강조한 것은 직원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분위기 조성이었다. SK그룹은 근로자들의 출퇴근 카드제를 없애 자율적으로 작업에 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임원을 위한 간부식당도 없앴다. 유공을 인수한 뒤 제일 먼저 식당, 사택 등 종업원 복지후생시설부터 개선했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직원들과 함께 가려고 했다. 유공을 인수했을 때 2000여명이나 되는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인수했다.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직원이 2000여명이었지만 이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재교육과 훈련을 시켜 SK 가족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지난 1996년 SK케미칼에서 3600여명의 임직원중 3분의1을 정리해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잡음은 거의 없었다. 충분히 보상해줬기 때문이다. 퇴직금 이외에 별도로 40~50개월치 월급에 해당되는 퇴직 격려금을 제공했다. 또 퇴직 후 2년동안 의료보험, 학자금을 제공했고 창업지원센터를 통해 창업 활동을 돕기까지 했다. 회사로선 재정상 큰 부담이었지만 인간위주의 경영을 추구하는 SK 기업문화속에선 가능한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