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CEO와 시스템에 의한 경영’ 유산 남겼다

"기업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며, 경영은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
　최종현(전 SK그룹 회장)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말이다. 기업이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과도 같다. 그러나 맨 손으로 회사를 일궈 키워온 한국의 1세대 기업인들이 경영과 소유를 분리해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최종현은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고, 일찌감치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덕분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근본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능력있는 사람이 경영을 한다'는 지론은 그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연'의 명제였다.
　"아버지께서는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회사는 이 사람이 하는 거다, 저 사람이 하는 거다, 정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런 정리를 하셔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최종현의 장남 최태원 SK㈜ 회장이 2002년 11월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선친 작고 당시의 상황이다.
　최종현은 생전에 자녀의 지분 상속에 대해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언급을 삼갔다. 최종현의 차남 최재원 SK엔론 부회장의 증언이다.
　"아버지께서는 `회사를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관둬라'고 하시면서 `대신 회사를 받게 되면 책임까지 함께 갖고 가야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형님이 상속받은 지분이 1500억원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는 금융 구조상 기업에 자금을 빌려주면 회장의 지급 보증을 요구했죠. 상속 당시 SK 계열사 차입금중 개인 지급 보증은 6조원에 달했습니다. 부채금액만 놓고 보면 상속 포기를 할 만한 상황이었죠. 회사로 들어가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형제의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그룹총수 같았으면 사전 지분정리를 통해 2세경영의 길을 일찌감치 열어줬을 것이지만, 최종현은 달랐다. 그는 생전에 지분정리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주변에서 지분정리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했을 때도 그는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지 뭣때문에 그것을 내가 해줘야 하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SK그룹이 최종현 사후에 SK글로벌 사태를 겪은 것도 그 원인을 굳이 따진다면, 방치하다시피 한 지분정리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일부의 분석도 있다.
　경영 수업에 있어서도 최종현은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1990년대 초반 ㈜선경에 입사한 아들 태원이 회사 경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펼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생각하고 네가 고민해서 네 실력으로 해결을 해야지,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 내 대답은 회장의 대답일 수 밖에 없는데 너는 회장도 아니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회장실에 자꾸 들어오지 마라"는 냉정한 꾸지람은 아들의 독립심과 책임감을 일깨워주려는 속뜻이었다. 대신 최종현은 아들들을 데리고 `기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다. 당장 지분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 내세우는 것보다 경영자로서의 철학과 시스템에 의한 경영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는데 버팀목이 될 것이란 게 최종현의 믿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결재하고 결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보다는 `도대체 그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경영진과 시스템이고, 이 두 가지가 있어야만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이 가능하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조금 해보다가 사양산업이라고 접고 또 다른 것을 되는대로 해보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였죠." (최태원 SK㈜ 회장)
　최종현이 세상을 뜨고난 후 1998년 9월 아들 태원은 SK㈜ 회장에 취임했다. 재계에서는 으레 최태원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SK그룹의 결정은 달랐다. 그룹 총괄은 실무 경험이 풍부한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에게 맡겨졌다.
　최종현 사후 SK그룹이 국내 대기업 가운데 최초로 사실상 전문 경영인 체제의 닻을 올린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그룹 사장단으로 구성된 경영 위원회의 선택이었다. 재계는 뜻밖이라는 반응이었지만, SK그룹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최종현이 강조한 전문 경영인과 대주주간의 철저한 `파트너십 경영론'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길승 회장이 물러난뒤 최태원 회장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SK그룹의 새로운 경영 시스템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지난해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SK그룹 최고경영자(CEO) 세미나는 최태원 회장이 주재한 첫번째 `장기 전략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은 1979년 3월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2박 3일간의 열띤 난상토론을 통해 SK그룹의 새로운 50년을 이끌어갈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른바 `뉴 SKMS'(SK경영관리체계)였다.
　"SKMS는 화석화한 경영 이념이 아니다"라는 최종현의 뜻과 같이 `뉴 SKMS'는 SK그룹이 급변한 경영 환경속에서 무엇을 가치로 삼아 추구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SKMS의 범위는 회사와 직원간의 관계에서 벗어나 고객과 사회, 주주, 구성원 등 모든 이해 관계자들의 `행복 극대화'로 확대됐다. 좀 더 복잡해진 사회에서는 기업이 스스로와 구성원들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되며, 주주와 고객, 나아가 잠재적인 고객이 될 사회 전체의 행복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SKMS의 새로운 비전이다.
　최태원 회장은 또 각 계열사들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계열사 경영은 이사회를 중심으로 하고, 그룹의 형태는 과거 중앙 집권적인 형태에서 브랜드와 기업 문화를 공유하는 협력체(네트워크)로 바꾸어 나간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전문화된 경영 환경에서는 더이상 총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의사 결정 체계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젊은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이는 평소 오너와 전문 경영인간의 역할 분담을 강조하며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 `파트너쉽 경영' 체제를 도입한 최종현의 경영 철학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해말 `뉴 SKMS'의 달라진 모습을 공개하며, "2005년이 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하는 `뉴 SK'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시작하는 첫 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SK그룹의 새로운 50년, 그 개막을 알리는 선언이자, 최종현이 물려주고자 했던 `시스템 경영'의 유산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