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소버린戰 승리’ 26년전 이미 기반 닦았다

SK㈜ 전신인 유공은 1990년 1월 국내 최대의 도시가스 회사인 대한도시가스의 지분 50%를 인수한 일이 있었다. 규모가 450억원에 달하는 큰 계약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항덕 사장은 계약서를 작성할 때까지 회장이던 최종현(전 SK그룹회장)에게 이를 보고하지 못했다. 협상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었던 것이다. 언론 발표를 하루 앞두고 김항덕은 회장실을 찾아 “실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최종현은 “유(You)가 그거 하겠다고 했잖아”라며 가볍게 넘어갔다. 최종현은 계열사 경영을 철저하게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그들을 신뢰했다. 김항덕 전 사장은 “10년 동안 유공 사장을 지내면서 단 한 번도 회장의 서명 결재를 받은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흔히 재벌 경영의 병폐로 오너의 독단을 꼽는다. 투자와 인사를 비롯한 경영의 중요 사항을 오너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현은 생전에 이러한 ‘황제식 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론을 즐겼고 ‘합리적인 경영’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았던 그는 1인 지배가 아닌 시스템에 의한 경영을 추구했다. SK그룹이 ‘SKMS(SK경영관리시스템)’라는 독자적인 경영 매뉴얼을 갖고 있는 이유도 최종현의 이러한 경영철학과 맥이 닿는다.

“1979년에 만들어진 SKMS는 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다같이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합의에 따른 결과입니다. 인치(人治)를 하고 있으면서도 시스템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SK경영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이란 크기나 방향을 가진 벡터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최태원 SK㈜회장)

최종현의 경영 철학은 손길승 회장을 거쳐 최태원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고 나서도 변함이 없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최 회장의 경영스타일 또한 ‘토론해서 분석하고, 협의해서 합의한다’고 표현될 정도로 임직원들과의 토론을 통한 합의를 중시한다.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오너의 독재 경영을 견제하기 위해 최 회장이 들고 나온 방법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었다. 이사회를 ‘오너 경영’의 들러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2004년 1월30일 지배구조 개선 로드맵을 발표한 SK㈜는 2월22일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비중 70%로 확대, 내부거래에 대한 감시 역할을 수행하는 ‘투명경영위원회’ 신설 등을 포함하는 정관개정안을 의결한다. 사외이사로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명망가 5명이 추천됐다.

3월12일 열린 SK㈜ 주주총회는 소버린자산운용과의 경영권을 건 한 판 대결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주주들은 이 날 SK㈜가 추천한 이사들을 지지함으로써 최태원 회장의 손을 들어줬지만 소버린의 반대로 정관개정안은 부결되고 말았다. SK㈜는 이날 ‘주주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정관개정안 부결과 상관없이 사외이사 70%로 구성되는 새로운 이사회를 중심으로 앞으로 독립적이고 투명한 이사회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희는 이미 수차례 천명한 바와 같이 이사회를 명실상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지배구조를 갖춰 나갈 것입니다.”

최태원 회장은 주총 직후 사외이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사회 사무국을 신설하고, 사외이사들에게 별도의 사무실을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모양만 독립적인 이사회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특히 최 회장은 자신의 집무실을 옮기면서 그 자리를 사외이사들에게 내주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사외이사들 앞에서 경영 현안을 브리핑했다. 최 회장은 2004년 11월11일 ‘팀장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사회 중심 경영은 이제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생존의 문제이고 왕도가 없습니다. 훌륭한 최고경영자(CEO)라도 견제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이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다 보면 처음에는 효율성이 좀 떨어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효율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문위원회도 설치됐다. 신설된 전문위원회는 투명경영위원회, 제도개선위원회, 전략위원회, 인사위원회 등이다. 특히 투명경영위원회는 사외이사 2명과 사내이사 1명으로 구성되었고, 위원장은 사외이사가 맡음으로써 경영진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가 가능하도록 조직했다.

이사회가 독립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실질적인 의결기구로 자리를 잡게 되자 사외이사들도 투명경영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SK㈜ 사외이사 7명은 2004년 8월20일 국내 상장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사외이사 윤리강령’을 선포했다. 윤리강령은 독립된 이사로서 이사회가 최고 결정기구임을 재확인하고, 이해관계자로부터 투명하고 초연한 입장을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사회 강화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SK㈜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명망가들의 평가는 어떨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과 법제처장을 지내고 지난 2000년부터 SK㈜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한영석 변호사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SK와 인연을 맺기 전에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SK㈜는 돈 잘 버는 에너지 회사’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사외이사제도는 진화가 아닌 혁명의 시기를 맡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아직 사외이사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한 전범(典範)이 없거든요. 미국에서 도입돼 일본에서 흉내 내는 정도지요. 새로 사외이사가 되신 분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는 지난 몇 년보다 요즘 몇 달이 더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스로도 각오가 달라지고 책임도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지금은 그런 차원에서 SK에 대한 인상도 많이 달라졌어요. 이것은 분명히 혁명입니다.”

2004년 3월11일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로 선출된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소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외이사를 맡고보니 도대체 지난 날의 불미스러운 일이 왜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SK㈜는 탄탄하고 견실한 회사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회사라 해도 이제는 대내·외적인 리스크에 철저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SK㈜ 그동안 사외이사 비중이 늘리는 등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롭게 재정비하려는 굳은 의지를 보였어요. 이사회에 참석해 보니 저희 사외이사들의 역할이 잘 수행될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남대우 사외이사는 SK㈜와 소버린 양측에서 동시에 추천을 받고 2005년 3월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선출된 인사다. 한국가스공사, 한국조폐공사, 풀무원, 광업진흥공사에서도 사외이사를 맡았던 그는 SK㈜ 이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사회에서 최태원 회장의 역할은 정확히 10분의 1입니다. 최 회장이 스스로 역할을 줄이기 위해 상당히 말을 아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덕분에 이사들은 모든 이사회 안건에 대해 충분한 토론을 진행하죠. 다양한 경험을 지닌 사외이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안건마다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SK㈜의 지배구조개선은 우리나라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의 투자자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고, 이처럼 중요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돼 개인적으로도 큰 보람을 느낍니다.”

최태원 회장과 SK㈜의 이러한 지배구조 개선 노력에 대한 외부의 평가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각각 2004년 9월과 12월 SK㈜의 지배구조 개선 및 투명경영 실천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SK㈜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또 한국기업평가도 2005년 3월 SK㈜ 신용등급을 한 단계 높이면서 “SK㈜ 이사회의 독립성과 업무감독 기능이 확대됐고, 경영 투명성이 높아졌으며 계열사의 구조조정 이행과 양호한 사업 안정성 및 현금 창출력에 힘입어 계열사에 대한 부담 요인이 감소됐다”고 밝혔다. 또 메릴린치증권은 기업분석보고서를 통해 “SK㈜는 최고경영자가 해외 주주들과 직접 대화하는 유일한 한국 재벌기업”이라고 호평했다.

2005년 3월11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의 이사 재선임안은 60.63%의 지지를 받으며 통과됐다. 국내 주주는 물론 주총장에 출석한 외국인 주주들의 40%이상이 최태원 회장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로써 SK㈜는 일부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며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의 관심은 처음부터 ‘경영권 방어’라는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SK㈜의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었다. 2004년 10월9일 SK㈜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을 거스르는 경영권 방어보다는 SK의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힘을 쏟을 것입니다. 경영상 필요하고 경영권 방어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이라도 시장에 반하는 정책이라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시장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영을 펼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