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물현대史>요리도 식사도 업무만큼 열정적으로

최종현은 대식가이면서도 미식가였다. 유학시절부터 식사량이 남들보다 두배나 됐고, 술도 두배로 마시고, 일도 두배로 했다. 뭘 해도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커다란 체구, 약간 거무튀튀한 얼굴을 갖고 있던 탓에 유학시절 친구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멧돼지’였다.(SK그룹의 원로사장들은 그를 가리켜 곧잘 ‘아기돼지’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직원들은 ‘똘똘이 회장님’이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실제 그는 일반인들에 비해 식사량이 많았다. 비행기에서 기내식 메뉴를 보고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여러 가지 주요리 가운데 하나만 고르기가 힘들어 아예 있는 것을 다 줄 수는 없겠느냐고 물어 여승무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 보통 2시간, 길면 3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별명과 달리, 그의 입맛은 아주 까다로웠다. 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맛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먹기도 많이 먹었지만, 제대로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도 그랬지만,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요리에 대한 그의 유별난 관심은 유학시절부터 비롯됐다. 시장을 직접 보는 일이 많았고, 외식보다는 집에서 해먹는 것을 좋아했다. 유학시절 최종현은 온갖 요리를 잔뜩 해놓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배불리 먹이고 흐뭇한 표정을 짓곤 했다.

“보통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 한번에 한가지씩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버지께서 손수 이것저것을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우리 가족은 모두 음식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맛 없는 것을 먹느니 차라리 굶는게 낫다는 주의였습니다. 식사시간은 길면 3시간까지 걸리기도 했습니다.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토론을 즐기셨습니다. 정치나 경제보다는 주로 과학을 주제로 하는 토론이 많았습니다. 가령 ‘직류와 교류의 차이는 뭐냐’ ‘중성자탄 원리가 뭐냐’ 같은 것이 주제로 올랐습니다.”(최재원 SK엔론 부회장)

일종의 미식가였던 그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값비싸고 희귀한 요리를 즐긴 것은 아니었다. 한식이든 양식이든 일식이든 중식이든 음식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먹는 스타일이었다. ‘옷은 편한 걸 입어야 편하고, 음식은 입에 맞는 것을 먹어야 맛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옛 시카고 대학 동창들은 주말마다 최종현 회장 집에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너무 그의 집에서만 모여서 얻어먹기가 미안해서 한두 번은 나도 대접하는게 좋겠다 생각해서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모처럼의 저녁 대접이라 요리사를 사서 내 딴에는 그의 까다로운 식성에 맞도록 제법 정성을 들여서 식탁을 차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음식은 돈을 들인다고 맛이 있는게 아니라 공을 들여야 맛이 난다. 이 음식들은 모두 남이 만든게 아니냐. 이런 음식을 먹으려면 다시는 네집에 오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사실은 음식이 그의 입에 맞지 않아서 생트집을 부린 게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잔칫날 음식같이 차려 놓으면 너무 부담스러워서 자주 와서 먹지 못하겠다는 뜻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습니다.”(홍사중 전 조선일보 고문)

최종현은 외국출장을 가면, 가급적 그 나라 토속음식을 선호했다. 현지 직원들이 지레짐작으로 한국음식점으로 안내라도 할라치면, “촌스럽게 해외에 나와서까지 한국요릿집만 고집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곤했다. 부인 박계희씨와 했던 마지막 스페인 관광여행에서도 그는 삼시 세끼를 스페인 음식으로 해결했다.

‘입에 맞는 음식이라야 맛이 있다’고 주장했던 그는 술도 ‘입맛에 맞는 술’을 고집했다. 조니워커 블랙이었다. 가격으로 치면 조니워커 블랙은 조니워커 블루나 골드에 비해 싼 술이다. 물론, 다른 술과 비교하면 조니워커 블랙도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재벌회장이 먹는 술 치고는 약간 시시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최종현이 조니워커 블랙을 고집했던 것은 유학시절 마셨던 이 술의 추억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에 나가서도 꼭 조니워커 블랙만을 찾았다. 이 때문에 그의 수행비서는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체류일수를 계산해 필요한 병수를 맞춰 조니워커 블랙을 들고다녀야 했다.

“한번은 중국출장길에 임원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일이 잘돼 기분이 좋아진 최종현 회장이 임원들에게도 자신이 마시는 조니워커 블랙을 건네자, 수행비서의 얼굴이 사색이 됐습니다. 가져온 조니워커 블랙은 얼마 안 남았는데, 임원들이 눈치없이 주는대로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는게 아닙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수행비서의 얼굴을 보고서야 임원들도 ‘아차’ 싶어 더 이상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이노종 SK아카데미원장)

최종현은 스트레이트보다 스카치소다를 즐겨 마셨다. 맥주를 먹어도 입가심으로 스카치소다를 마셨고,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와 소갈비를 먹을 때도 스카치소다를 빼놓지 않았다. 그가 조니워커 블랙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그룹내에 널리 알려지자 임직원들도 그 이상의 고급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돼버렸다고 한다.

최종현의 주법은 독특했다. 술과 소다수를 적당히 배합하는데, 처음에는 진하게 먹다가 시간이 갈수록 순하게 탔다. 술을 마실 때 화제는 주로 업무 얘기였다. 안주도 별 다른게 없이, 땅콩 같은 것 한 접시 앞에 놓고 서너시간을 토론하는 식이었다. 중간에 얘기를 듣다가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있어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 이제 그만”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술자리는 그걸로 끝이 났다.

그렇게 자주 술을 즐겼지만, 최종현은 낮술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 업무상 불가피하게 낮술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취할 정도로 마셔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술을 마셔도 언제나 업무가 우선”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음식과 요리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최종현은 특히 김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루는 최종현 회장이 김치를 담그는 과정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라고 부인에게 일렀습니다. 배추는 어떤 것이 더 단맛이 나나. 고추는 어떤 것이어야 곱게 붉은 색상이 나오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몇 도의 온도가 좋은가. 어떤 그릇에 담아놓는게 좋은가, 질그릇이냐 사기그릇이냐. 김치통 자체를 거꾸로 뒤집어 놓아서 양념과 간이 위아래로 골고루 들 수 있는 용기를 고안하라. 보관할 때에는 잘 익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도가 제일 좋은가. 김치를 보관하는데 냉장고와 냉동고는 어떻게 다른가 등등. 이런 것은 도저히 일반 가정집에서는 할 수 없는 ‘실험’이었습니다.”(홍사중 전 조선일보 고문)

최종현의 기가 막힌 지시(?)에 부인 박씨는 할말을 잃었다. 박씨는 ‘일반 가정집에서 그렇게 김치를 담그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부인의 항의에 부닥친 최종현은 궁리 끝에 워커힐호텔에 연구소를 만들어 ‘수펙스(SUPEX)’ 김치를 개발했다. ‘수펙스’는 ‘수퍼 엑설런트(Super Excellent)’를 줄여 최종현이 만든 신조어다. 그는 ‘수펙스’를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로 생각했다. 목표를 높이 잡으면 그만큼 장애요인을 더 파악하게 되고 성취욕도 높아지므로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그 성과는 더 커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이같은 ‘수펙스’이론은 후에 일본의 닛케이(日經)비즈니스에 특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최종현은 김치, 깍두기는 물론, 보쌈김치, 오이소박이, 양배추 김치, 나박김치, 단무지, 짠지까지 갖가지 김치를 즐겼다. 김치에 대한 그의 까다로운 입맛은 어쩌면 대를 이어온 종가집 김치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번은 미국 출장길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둘째아들 재원의 집에 들러 김치에 대해 특강을 한 적도 있었다. 당시 둘째며느리는 처음으로 시부모를 위해 저녁상을 차렸는데, 김치 맛을 본 최종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며느리에게 김칫독을 보여달라고 했다. 신혼살림에 변변한 김칫독이 있을리 없었다. 큰 냄비속에 김치를 담아 비닐 랩으로 덮어씌워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최종현은 일장연설을 했다. “김치가 국물에 잠겨있지 않아서 이렇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거야. 김치 유산균은 공기와 닿는 걸 아주 싫어해서 김치는 반드시 국물에 잠기도록 해야한단다.”

최종현은 그러고는 숟가락을 갖고 김치를 국물 속으로 꾹 눌러 잠기게 했다. 밖에서는 수만명의 직원들을 거느린 재벌회장이었지만, 안에서는 둘째며느리의 김치까지 세세하게 신경쓰는 인정 많은 시아버지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