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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05년 05월 26일(木)
“질서 과잉의 시대, 글쓰기로 교란”
'시뮬라시옹 이론'의 佛석학 장 보드리야르 - 연세대 이상길 교수 대담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밴드
원본과 복사본, 진짜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통해 현대사회를 탁월하게 분석해낸 프랑스의 석학 장 보드리야르(77), 그의 쉽지않은 시뮬라시옹 이론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대중화됐고, 이는 시뮬라시옹 이론의 대가인 그가 직접 원본(보드리야르의 이론)과 가상 이미지(영화)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빚기도 했다.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한국을 찾은 장 보드리야르와 연세대 이상길 영상대학원 교수가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만나 대담을 가졌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지치지 않고,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는 탈근대성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해, 가상세계가 ‘완전한 실재’가 된 현대사회 분석을 거쳐 세계화와 테러시대의 철학에 대한 논의를 풀어냈다.

―일반적으로 ‘탈근대’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지적 꼬리표를 받아들이는가.

“‘탈근대성’과 관련해 일종의 오해가 있다. 나 스스로 ‘탈근대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탈근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근대성의 종말과 시뮬라시옹을 연결시키길 원한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나는 ‘매트릭스’같은 영화에 영감을 불어넣은 사람이다. 정말 그로테스크한 상황이다. 탈근대성 논의는 미국에서 왔고, 그곳에서 활발하다. 사람들은 역사의 종언, 정치의 종말 등을 논하지만, 이는 총체적인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해의 기초가 되고 지금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석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 현상속으로 좀 더 섬세하고 미묘하게 들어가면 탈근대성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냥 그대로 끝인 것이다.”

―그렇다면 탈근대성보다 근대성의 극단적 양상에 관심을 가지는가.

“근대성의 와해, 혹은 어떤 종류의 상승하는 힘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실재 그 자체, 현실 원리, 합리성의 원리 등은 붕괴하고 있다. 전자 테크놀로지나 네트워크 시대에 더 이상 원래 형태를 지닌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원본이 있다 해도 가상성에 흡수돼 버린다. 일종의 ‘현실의 종말’이다. 거짓과 진실, 원본과 카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세계는 이미 건설된 것, 인위적인 것이며 진실은 모두 만들어진 것, 가상적인 것이다. 가상성이야말로 ‘완전한 실재’이다. 더 이상 자연세계는 없다.”

―1991년 걸프전이 임박했을 때,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을,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걸프전은 정말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글을, 전쟁이 끝난 뒤에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시뮬라시옹과 가상성, 세계화의 논리를 구체적인 현상 분석을 통해 흥미롭게 풀어낸 결과였다.

“그렇다. 당시 우리는 완전히 정보화된 세계에 있었다.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화면, 디지털과 테크놀로지를 통과해야 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결코 사건의 실재와 마주할 수가 없다. 사건 그 자체는 이들의 절대적인 융합 뒤로 사라져 버린다. 이는 걸프전에서 폭력이나 사상자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짜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미디어 보도와 이미지 안에서 즉각 용해돼 버렸다. 전쟁은 사전에 고도로 프로그램화돼 있었고, 그대로 실현됐다. ‘레디 메이드’였고 그렇게 현실속에 투사됐다. 이같은 분석은 걸프전뿐 아니라, 이라크전에도 유효하다.”

―그 두 전쟁 사이에는 진정한 ‘사건’이라 할 만한 9·11이 있었다. ‘테러시대’ 철학은.

“문제는 오늘날 사건이란 무엇인지, 사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사건은 예측불가능하고 급작스러운 것이다. 정보가 모든 것을 흡수하고 집어삼키는 이 동질적인 세상에, 혹은 동질성 자체에 틈과 균열을 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세계는 가상적으로 완전하게 프로그램화되고 조직돼 있다. 세계질서 안에서는 아무 일도, 어떠한 폭력적 사건도 일어나선 안 된다. 모든 것이 예측되고 예방돼야 한다. 전쟁뿐이 아니라 어떤 것도 일어나선 안 된다. 모든 종류의 특이성의 말살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세계질서에 틈과 균열을 내는 모든 것이 바로 테러리즘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세계화 폭력속에서 더이상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가.

“우리는 점점 더 화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평화와 화해는 일종의 균형상태를 요구한다. 냉전시대에는 비록 공포에 의해서지만 가시적 균형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완전한 불균형만 있다. 세계적 강대국과 테러리즘 세력 사이의 급진적 적대만 있다. 강대국은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협상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겐 적대자는 없고 제거해야 할 ‘악’만이 있다. 여기서 타협이나 균형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화는 점점 더 폭력적인 차별속에서 진행될 것이다.”

―걸프전, 9·11, 세계화 등에 관한 글쓰기는 ‘상징적 도전’으로 여겨진다. 글쓰기를 통해 체계의 상징적 질서를 교란시키려 하는가.

“그렇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고 우리는 결코 하나의 객관적 진실을 알 수 없다. 설령 진실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진실을 넘어 역설로서 상황을 움직이려 한다. 정보의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과잉, 질서의 과잉이 프로그램화된 현질서 안에서 그 질서에 반대되는 공허, 빈 구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확실성에 맞서는 불확실성을, 자명성에 맞서는 수수께끼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유는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 시대 지식인의 역할은.

“이제 도덕적이며 지적 의식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범주는 없다. ‘완전한 실재’안에서 지식인의 자리는 없다. 완전한 실재는 부정적 작업을 추방하며 실재와 거리를 둔 비판적 사유를 불가능케 한다. 나역시 나의 언어 작업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다만 장기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낳길 바랄 뿐이다.”

/ 정리〓이상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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