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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푸른광장 게재 일자 : 2006년 08월 17일(木)
초대 감찰위원장 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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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을 기리는 노래가 많지만, 삼일절과 광복절 그리고 개천절은 날 자체가 지닌 뜻이 서로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리는 노래의 가사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데서 묘한 인연으로 이어진다. 가사를 지은 이는 바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시다.

위당 선생은 삼일절, 이날이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고 했으며,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고 광복의 날을 기뻐했고,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고 개천절의 의미를 명쾌히 밝혔다.

위당 평생의 온축이 일찍이 한문으로 쓰여 간행되었던 ‘담원문록’이다. 알다시피 담원은 위당의 또 다른 호이다. 이 문집이 따님 정양완 선생의 노심초사 결과로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전 3권 1700여 쪽의 한글본으로 번역 간행된 것은 지난 4월의 일이다. 광복절 즈음하여 이 책을 뒤적이던 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시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열한 살에 낯익은 거리 떠났고/열세 살 때가 을사년이었지/열아홉엔 북으로 압록강을 건너니/조상의 옛 터전 이미 잃었네.’

아직 정부가 들어서지 않은 1948년 봄, 흑석동에서 회현동으로 이사한 다음에 쓴 ‘장흥방에 세 들어 살며 느꺼움을 읊다’라는 시다. 선생의 나이 벌써 56세, 스스로 이르기를 ‘죽마 타던 어린애가 머리만 벌써 희어진’ 때였다. 그러나 광복은 왔으되 시절은 수상하여, ‘국토는 아직도 반이 막혀 있으니/말 돌릴 만한 터만 있어도 깜냥에 이미 넘치고/한평생 애쓴 바는/화려한 집에 있지 않았네./멀쩡하게 세월만 보내고 때 놓칠까 두려우니/어정어정 세월은 물 같은 것을’이라고, 대가는 걱정과 조바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화려한 집이나 구하자고 한 평생 애쓴 바가 아니어서, 정녕 걱정과 조바심이야 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그것이었으리라.

그 해 여름, 대한민국 정부가 서고, 이승만 대통령은 삼고초려 끝에 위당을 감찰위원장에 앉힌다. 감찰위원회는 오늘날 감사원의 전신이라 할 것이다.

학자요 시인으로만 잘 알려진 위당이시다. 그러기에 감찰위원장이라는 자리를 1년 남짓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물론 벼슬에 탐을 낼 위당이 아니었다. 다만 감찰위원회의 역할과 업무에 대해서는 여간 적잖은 사명과 소신을 가졌던 듯하다. 멀쩡하게 세월만 보내고 때 놓칠까 두려워한 그이고 보면, 감찰위원회의 곧기로 이름난 감찰관 유정식(1913~2003) 같은 이들을 만나 함께 일했던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위당은 충청도 학술답사 길에 서산의 한 다리에서 그를 만난다. 서울로 돌아와 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그 마지막 줄에 ‘그대여, 힘써 지킬지어다, 깨끗한 그대 마음/그 남은 빛을 옛 벗에게까지 나눠주구려.’라고 노래한다.

위당의 뒤를 이어 감찰위원장이 된 사람은 노진설(1900~1968) 대법관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악질 일제 형사 출신에게 첫 사형선고를 내린 이다. 위당은 그에게 ‘추워도 갖옷이 없다는…, 대법관 노진설에게 드리다’는 시를 보냈다. 그 가운데 한 구절.

‘법관은 우뚝하니 벼슬만 클 뿐/대여섯 안건 올라오면 점심은 거르기 일쑤./관리의 분수로 마른 오징어라도 요행히 사게 되어/씹고 나면 가을 산이 눈에 가득 깔끔하리.’

대법관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징어 한 마리 구해 먹기 만만찮았다는 게 지금으로서야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꼬르륵거리는 배를 질긴 오징어로 씹어 시장기를 속이고, 눈 한번 비비면 맑은 가을 산이 눈에 선명할 것이라는, 마음에 그렇게 곧고 깨끗한 이들이 아니고서는 통하지 못할 시적 대화가 위당의 위트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 시절의 법관이 노진설·유정식 같은 이들만이었다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위당이 두려워하는 바는 실로 거기에 있었다. 법관이라는 자리에 설렁설렁 녹아들다 보면, ‘접시에 온갖 맛난 고기가 나오며/금을 장식한 방장 안엔 젊은 여인이 나온다네./털외투도 모자라 차 안에 난방장치까지 한다면/길에 얼어 죽은 송장 있음 어이 알지.’라고 걱정한다. 위당이 통탄한 대로 ‘국토는 아직도 반이 막혀 있으니’, 그가 살아계신들 통탄은 아직 풀길 없는데, 풀기는커녕 이즈음의 나라꼴을 보면 한숨만 더하실 것 같아 민망할 따름이다.

차관급의 판사며 고위 검찰 그리고 경찰 간부가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세태는 그 가운데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고운기 / 연세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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