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인생>“체조가 좋아 손바닥 굳은살 도려내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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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중 1학년 1반 1번. 2번이라도 되고 싶어서 까치발을 들어봤지만 어림없는 키. 팔도 다리도 짧아 운동선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체격. 하지만 꿈을 이루려는 자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이덕분(62·세종대 예체능대 교수·사진)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은 국내 여성선수로는 사상 2번째 올림픽 무대 출전, 대학교수,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국제심판, 여성 최초의 방송 해설의원, 체육학 박사 등 꿈 꿨던 모든 것을 이뤘다. ‘작은 거인’으로 불릴만한 이 회장을 지난 1일 서울 광진구 군자동의 세종대학교 ‘용덕관’에서 만났다.

40대 중반일 때 처음 봤던 그대로 여전히 단발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이 회장은 “인터뷰 덕분에 모처럼 학교에 나왔다”고 한다. 학교에 몸담은 지 근 40년만(1968년 조교임명)에 1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받았던 것.

‘멋쟁이’ 교수님이란 인상을 얼마간 퇴색시킨 것은 수더분한(?)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 속에 ‘출생 비화’가 있단다. “어머니가 다리 수술을 여러 번 받으셨는데 임신사실을 모르고 독한 약을 많이 드셨데요. 을지로 ‘백인제(백병원 설립자)병원’에서 아이를 살리느냐, 어머니를 살리느냐를 선택하라고 할 정도였는데 아버님 결심으로 출산하게 됐다고 해요. 백 원장님이 ‘하나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으니 이름을 덕분이라고 해도 되겠다’고 그렇게 붙였다고 합디다.”

집 부근의 동덕여중에 입학했는데 ‘태생적으로 독해서인지’ 키는 작아도 체력검사에서 뜀박질을 잘해 육상부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받았다. 하지만 체조부가 신입회원을 받으려 운동장에 매트를 깔고 시범을 보이는데 구경 갔다가 선배가 ‘너도 한번 해봐라’하는 말에 교복차림 그대로 멋있게 구른 것이 발단이 돼 체조에 입문하게 됐다.

“기계체조라고 해서 ‘기계 속에 들어가 하는 체조인가’ 생각돼 싫다고 했어요. 신시자라는 선배가 부모님까지 만나 설득해 체조부에 들어갔죠. 해보니까 재미가 있었어요. 3년간 입겠다고 큰 체육복을 산 탓에 긴 바지 단을 접어 입고 참 열심히 했죠.”

이 회장은 체조부에 들어간 후 몇 달되지 않아 덜컥 전국체전 개인종합 3위에 입상했다. “전국체전에 출전했는데 한 선배가 다리를 다쳤어요. 주장이었던 시자언니가 나보고 대신 나가라고 하데요. 긴장해서인지 다들 실수를 연발하는데 나는 하나도 떨리지 않더라고요.”

전국체전 메달로 자신감이 생겼다. 국가대표를 다음 목표를 세웠다. 체격조건이 좋지 않아 남들보다 2~3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체육관에 갔죠. 추운 겨울에 난방도 없는 체육관에서 몸을 충분히 풀지도 못하고 연습을 하다 부상도 많이 입었어요. 그 후유증으로 요즘도 다리하고 발가락이 아파요. 뼈를 다치면 서대문에 있던 ‘박 접골원’에 갔는데 원장님이 ‘덕분이 또 왔냐’할 정도로 단골이었죠. 평행봉을 하다보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는 데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걸 생살이 보일 정도로 면도칼로 도려내요. 생살이 빨리 굳게 한다고 촛농을 그 위에 떨어뜨리거나 뜨거운 물에 담그는데 비명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요. 지금도 그 때를 돌이켜보면 ‘그렇게도 체조가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남이 자는 시간에 나가서 복근운동이라도 하고 들어와야 그들을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동덕여고 2년 때 태극마크를 단 이 회장은 64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한 대표팀의 일본 전지훈련 명단에서 별 사유 없이 제외됐다. 풀이 죽어 이불 속에서 울고만 있는 딸을 보고 어머니가 체조협회를 찾아가 탈락이유를 따졌더니 ‘용모(너무 작은 키)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어머니가 집요하게 따진 끝에 재선발전이 열렸고 결국 다시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당시는 경비를 아끼려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 일본체육대학 체육관에서 훈련을 했는데 체육관이 400명이 함께 운동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어요. 전지훈련은 시각과 관심을 세계로 향하게 한 좋은 기회였고 올림픽출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했지요.”

이 회장은 대학진학을 앞두고 여러 곳에서 입학 제의를 받았다. 나중에 교편을 잡겠다는 생각에 서울사대도 끌렸고 도쿄올림픽을 생각하면 체조의 전통이 깊은 경희대가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 전신)의 전성래 교수가 찾아왔다. ‘동덕여고 졸업반 7명을 모두 받아 체조팀을 만들 생각인데 국가대표인 이덕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듭 사절했으나 친구들도 찾아와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수도사대로 가자’고 부탁해 결심했죠.”

대학 2년 때 도쿄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체조의 올림픽 출전은 60로마올림픽 이후 2번째. “포디엄에 올라가 연기를 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당시 한국체조의 수준으로는 메달을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아무튼 최선을 다했어요. 특히 평균대 위에서 핸드스프링(손을 짚고 회전하는 연기)을 세계 최초로 연기했어요. 9.2점의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한국체조의 국제 지명도가 요즘만 같았다면 이 연기를 국제체조연맹(FIG)에 보고해 ‘이덕분 핸드스프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거라고 해요.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당시 외국의 한 임원이 해 준 이야기입니다.”

68년 대학을 졸업한 이 회장은 조교로 학교에 남아 소망이었던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 70년 국가대표 코치, 협회 기술위원장을 맡는 등 체조계에서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를 오늘 날 ‘리듬체조의 대모’로 만든 계기는 76년 일본 전지훈련에서 찾아왔다.“중경대에서 전지훈련을 하는데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리본, 공, 줄, 곤봉 후프 등으로 연기하는 것을 봤어요. 그 아름다움에 영혼이 그대로 빨려든 것처럼 매료됐어요. 일본 코치에게 부탁해 따라하며 개념을 익혔어요. 당시는 리듬체조라 하지 않고 신체조라고 불렸죠. 기계체조는 76몬트리올올림픽에서 사상처음으로 10점 만점 연기를 펼친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이후 너무 서커스적인 요소를 중시해 여성미가 사라지고 부상위험도 높아져 하향세였는데 신체조 연습광경을 보곤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귀국해 곧바로 학생들에게 리듬체조를 가르쳤다. 학생 때 자신의 마루운동 안무를 직접 하기 위해 배워둔 발레가 큰 도움이 됐다. 직접 안무를 하고 기구도 제작해 77년 제1회 리듬체조발표회를 가졌다.

“리듬체조용 공을 구할 수 없어 핸드볼 공에 빨간색을 칠해 사용했지만 호평을 받았어요. 78년에는 문화체육관을 사정사정해서 대관해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총연습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MBC PD가 방송에 한번 내보내자고 하데요. 늘씬한 여대생들이 수영복이나 다름없는 의상을 입고 연기를 펼쳤으니 시청률이 높을 수밖에요. KBS에서는 아침 6시 건강체조 프로그램에 세종대팀을 출연시켜 10여년 지속했죠. 방송이 나가자 전국의 학교에서 배워보겠다고 연락을 해 와 기구와 음악 안무까지 제공하며 열심히 보급이 됐죠. 전국체전 마스게임, 86아시안게임 개막식 행사 등 체육행사 안무를 도맡았죠. 88올림픽 때 개막식에서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장면이 생각나죠? ‘정적’이라고 이름붙인 프로그램인데 제가 안무를 맡았어요.”

지난 2001년부터 한국여성스포츠회를 이끌고 있는 이 회장은 ‘전국어머니생활체육대회’를 창설, 이제는 12개 종목에 걸쳐 5000여명이 참가하고 각 시도에서 서로 유치하려 하는 주요대회로 키워 놓는 수완을 발휘했다.

“몇 개 종목은 4년 전부터 부부와 자녀가 함께 참가하는 대회로 만들었는데 호응이 좋아 다른 종목도 그렇게 하려 합니다. 여기서 꿈나무도 발굴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여성스포츠회 회원들에게는 “왜 여성을 안 시켜줍니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필요한 존재가 되자고 강조합니다. 여성 선수촌장, 여성 선수단장이 최근 배출된 것도 이렇게 조용히 여성들이 힘을 키워 온 결과가 아닐까요. 또 여성도 공부해야 하는 시대이니 야간대학이라도 가라고 합니다. 이에리사 촌장이 ‘선생님이 40대중반에 박사학위(90년 명지대)를 받는 것을 보고 나도 박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 후배들에게 모범이 된 것 같아 흐뭇합디다.”

체육부장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