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곽성호기자
고(故)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의 창업이념 중 하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었다. 삼성이라는 집단은 사회와 동떨어진 별종이 아니라 이 사회, 나아가 국가와 함께 호흡하는 공생공멸의 유기체라는 것. 요즘 말하는 상생(相生)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부친에 이어 그룹 회장에 오른 뒤 “기업 이익에 앞서 국가의 장래를 먼저 걱정하고 국가 이익과 발전을 앞세워야 하며 국민과 사회의 따뜻한 격려와 지원 속에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국가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회장의 의지는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후 실현된다.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그룹 차원의 봉사단인 삼성사회봉사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삼성사회봉사단은 30개 관계사의 16만여 임직원들이 3800여개의 팀으로 짜인 거대 네트워크를 통제하는 ‘헤드쿼터’로 성장하게 된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순화동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실에서 만난 한용외(60·사진) 사장은 “오랜만에 삼성사회봉사단으로 돌아와서 보니 조직이 너무나 커져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론 기업들이 사회공헌 활동을 하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기억도 못하고, 존재하기도 힘든 때가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전 사실 삼성사회봉사단이 창단됐을 때부터 6년간 단장 역할을 하다가 다른 계열사를 거쳐 7년 만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사업 규모나 조직이 놀랄 만큼 커졌더군요. 그러다보니 사회공헌에 참여하는 임직원들의 숫자나 봉사시간 등이 엄청납니다. 이런 공헌 사업을 이젠 좀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장은 우선 그룹의 봉사조직이 좀더 전문적이고 창조적이며 복합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삼성그룹 내 변호사들이 법률봉사단을 꾸려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었다. 하루에 60건 가량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면서 전문성을 키우는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고 한다. 창조적 활동의 예로 농촌의 특산물에 브랜드를 입히고 명품화 작업을 하고 있는 제일기획을 칭찬했다. 그는 봉사활동의 복합성을 얘기하면서 ‘역시 삼성맨’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현재는 기업들이 문화사업과 사회공헌에 각각 별도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앞으로 문화단체에 예산을 지원하고 이들이 소외계층들을 위해 정기적인 고품격 공연활동을 펼쳐준다면 1석2조의 복합적인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회공헌을 하더라도 효율성과 창의성까지 따져보겠다는 얘기다.
이번엔 ‘왜’ 기업들이 사회공헌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이건희 회장이 오래전 자신에게 들려준 얘기를 했다. “봉사단을 만들기 전에 하루는 회장께서 그러십디다. 자원봉사를 신입사원들에게 시켜보면 어떠냐고. 자원봉사를 하면 정말 고객이 고마운 줄 알게 된다고요. 돈 받고 하는 서비스는 진짜로 고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돈 안 받고 서비스를 해야, 그것이 진짜 고객에 대한 서비스죠.”
그는 사회봉사가 임직원들의 심성을 곱게 하고 질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다고 단언했다. 사회공헌이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저절로 높인다는 것. 삼성이 외환위기 전후로 사회공헌활동을 강화했는데, 공교롭게도 삼성이 대한민국 재계에서 강한 빛을 발휘했던 시기가 이때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사회공헌은 기업에 가시적인 반사이익도 전해준다는 얘기였다. 또한 “사회가 불안하면 장사가 안 된다”는 말로 사회공헌의 필요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금은 물건만 잘 만들고, 장사만 잘하면 끝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돈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 가지는 시대로 들어설 겁니다. 그럴수록 소비자들은 기업에 대한 기대가 커질 것입니다. 소비자들, 영악합니다. 잘하는 기업, 못하는 기업 잘 압니다. 앞으론 기업이 사회공헌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기억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비윤리적 행동 하나에 기업이 도산하는 때가 올 거예요.”
삼성은 해외에서도 사회공헌을 잘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그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약점이나 지역의 특성을 잘 파고 들어간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최근 6년간 미국에서 벌인 자선모금활동 ‘삼성 희망의 4계절’(Samsung Four Seasons of Hope)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유명 인사와 유력 기업이 연계한 자선 모금 활동 사업으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동참하기도 했다. 지난해 80만달러, 올해 100만달러 등 최근 6년간 총 1000만달러를 모금하며 자선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이 특히 모범을 보이고 있는 ‘1사1촌운동’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다르다. 한 사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농촌지역 주민들이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지금 우리 농촌은 믿고 기댈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의 전 계열사들이 1사1촌 결연마을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겠다는 것이다.
한 사장에게 기억에 남는 사회공헌활동을 물어봤다. 미국이나 중국에서 펼쳤던 거대 사업을 자랑하거나 태국에서 표창받은 예를 꼽을 줄 알았는데, 지난 1995년 발생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얘기를 갑자기 꺼냈다. 그는 당시 삼성의 사회봉사 총괄임원으로서 한 달 동안 붕괴현장에서 삼성사회봉사단을 총지휘했다. 삼성사회봉사단이 생기고 나서 발생한 최대 사건이자 연인원 1만명 이상의 임직원이 투입된 대규모 자원봉사였다는 게 한 사장의 말이다.
“그때 날씨는 왜 그리 더웠는지. 시신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데 정부에선 이를 냉동시킬 드라이아이스조차 조달을 못하는 거예요. 전국 삼성 계열사 다 뒤져서 얼음과 먹을 쌀을 공급해왔죠. 정부가 보유한 구조장비는 낙후돼있고, 그나마 있는 구조장비도 결제가 안 났다고 못 가져온다는 등 정말 당시 우리나라 구조체계는 너무나 엉망이었습니다.” 삼성은 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계기로 계열사 에스원이 주축이 된 구조단을 만들게 됐다. 이후 대만지진, 대구지하철화재 등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모든 대규모 사건 사고 현장엔 언제나 삼성 구조단이 대규모로 뛰어들고 있다.
한 사장은 현재 좀더 글로벌하고 미래를 대비한 활동 연구에 빠져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꺼낸 얘기가 최근 사회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다민족 가정’의 위기다. “미국을 봅시다. 다민족의 장점도 있지만, 자칫 그들에게 소외감을 안겨 범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미국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다민족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단일민족 얘기는 필요 없습니다. 이들이 미래에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우뚝 서고 소외되지 않도록 삼성은 앞으로 정부나 비정부기구(NGO)와 함께 준비해나갈 생각입니다.”
한 사장은 이처럼 사회공헌을 미래와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연결 지었다. 즉 지금 100억원을 쏟아 부으면 될 일을, 자칫 미리 대비하지 않아서 1조원을 써도 해결되지 못하는 일로 키우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엔 100억원이 아까울지 몰라도 미래에 다가올 밝은 미래를 본다면 결코 아까운 돈이 아니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또한 공교육 붕괴에 따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도 삼성 사회공헌활동의 특징이라고 했다.
“삼성이 펼치는 사회공헌활동이란 삶의 질 문제를 다루면서 바른 사회로 가는 방향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삼성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관점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키워나갈 생각입니다.” 그의 다짐 속에 강한 자신감과 넉넉함이 느껴졌다.
인터뷰 = 김만용기자 mykim@munhwa.com
사진 = 곽성호기자 tray9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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