不死의 히드라처럼 끈끈한 생명력… ‘多衆’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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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9개의 머리를 가진 불사(不死)의 괴수 ‘히드라(Hydra)’는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히드라가 등장하는 오래된 조각작품과 벽화, 도자기의 그림이 상당히 많다. 히드라는 꼭 헤라클레스와 함께 등장한다. 신화에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의 12가지 시련(試練)의 하나로 히드라를 퇴치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그려진다.

‘헤라클레스 대(vs) 히드라’는 서양인들에게 오랜 상징성을 갖는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중앙집중화한 국가의 통합자, 로마인들에게는 제국적 야망의 상징이었고, 초기 제국주의 건설자들에게는 경제적 발전을 의미했다.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헤라클레스는 권력과 질서,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됐다.

반면 히드라는 무질서와 저항의 상징이다. 현대적으로 보면, 체제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따라서 국가, 제국 및 자본주의에 위협을 가하는 이들이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말해질 수 없는, 체제의 코드가 새겨 놓은 ‘홈 파인’ 길을 따라 흐르지 않고 마구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세력이다.

‘다중’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나왔다. 그렇다고 ‘다중’이 개념과 함께 등장하진 않았으므로, 그 역사적 또는 현재적 양태와 관련해선 논란을 빚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바로 역사 속에서, 정확히 말하면 “민족국가의 포로였던 역사서술”에서 대부분 삭제된 다중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서 삭제된 것은 ‘지배자의 역사’에만 책임이 있지 않다. 역사서술이, 산업화 이후 단일한 노동계급에만 주목했거나, 또는 단일한 정체성-예컨대 흑인 등-만 떼어내 서술된 데도 원인이 있다.

공식 역사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작 패고 물 긷는 사람들’, 흑인 하녀들, 아프리카 노예들, 혁명적인 해적 선장,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혁명가들, 진정한 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잡색 부대, 선상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영국이 식민지를 확장하던 17세기 초부터 도시 중심의 산업화가 완성된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지배자들이 점점 세계화·지구화하는 노동체계에 질서를 부과하는 과정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본주의와 근대적 세계경제 곧 ‘제국’이 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책의 공동저자는 저명한 영국 역사가 톰슨의 제자인 피터 라인보우(톨레도대 교수)와 ‘국제노동사 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마커스 레디커(피츠버그대 교수)다. 저자들은 “우리의 책은 밑에서부터 본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책이 지배자가 아닌 ‘아래’로부터 바라본 역사서라는 의미이다. 또 패배/승리라는 이분법으로 역사를 보지 않는다는 의미도 갖는다. 책에 등장하는 다중들은 대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지옥 같은 노예선과 감옥 등에서 최후를 맞지만, 다중은 다시 불사의 히드라처럼 살아나기 때문이다. 책은 2000년 미국에서 출판됐으며, 오랜 번역작업 끝에 이번에 출간됐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