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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08년 12월 27일(土)
옥란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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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가 아름다운 화성의 궁평항 쪽을 향해 하염없이 달리다가 슬몃 송림 우거진 산허리 쪽으로 차머리를 돌리면 거기 옥란재(玉蘭齋)가 있다. 자궁처럼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이 남양 홍씨의 고택은 사방이 평화 투성이다. 본채인 관서당 앞으로는 그림처럼 물오리와 거위가 떠 있는 연못이 있고 산자락 아래 뒤 숲은 넓고 오래되어 배산임수의 풍수위격에도 어긋남이 없다. 본채의 뒤로는 사랑채를 비롯, 독락당과 또 다른 별채의 후원이 깊어 과거 벌죽했을 남양 홍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한다.

집 구경을 하며 정원을 걷다보면 조상을 잘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조상도 후손을 잘 두었다는 생각 또한 절로 하게 된다. 100년 넘은 집이지만 어디 한구석 퇴락한 데라고는 없이 잘 관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마당과 후원에는 철따라 꽃이 피고 감이며 모과, 대추며 고욤 같은 유실수들이 앞 다투어 열매를 맺는 바람에 사철이 소란하다. 툭 하고 알밤이 떨어지는가 하면 숲을 차고 장끼가 날아오른다. 고요함 중에 오고 가는 이런 자연의 소리 말고도 옥란재에는 거의 늘 사람의 온기와 정담들로 가득 차 있다. 허다한 명문가의 고택들에서 섬돌의 가을 햇볕 같은 애잔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과는 달리 ‘책 읽는 집’이라는 별호가 붙은 옥란재는 책 읽는 소리 말고도 사람들의 들고 나는 소리들로 적적할 새가 없다.

사람들은 왜 들길 산길을 허위허위 달려 그곳을 찾아오는 것일까. 그리고 한번 다녀갈 뿐 아니라 고향의 외가를 찾듯이 이런 핑계 저런 이유를 들어 다시 찾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건대는 아름다운 자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집주인의 푸근한 인정 때문에 더 그러한 것 같다. 언제 찾아가도 왈칵 반가워하며 맨발로 뛰어나올 듯 맞아주는 집주인 내외의 따뜻한 마음이 없다한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해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찾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각박하게 부대끼며 도시에 살다보면 목마른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푸근한 인정 또한 그리운 법이다. 옥란재 툇마루에 앉으면 나는 눈으로 스케치를 해 온다.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노란 애기똥풀이며 수련 사이를 미끄러져 가는 오리와 후박잎을 때리는 한여름 빗소리까지 눈으로 담아내온다. 천지를 물들이는 가을 단풍과 백설 애애한 겨울 풍경이며 밤하늘에 얼음처럼 박힌 별들 또한 마음속의 스케치북에 담아온다. 때로는 떨어지는 자목련 꽃 그림자 창호에 어리는 환한 독락당에 앉아 산새 울음에 귀 기울이다보면 짐짓 옛 선비의 자리로 돌아간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정신적인 멋 말고도 옥란재에 가서 좋은 점은 가끔 특별한 강좌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집 주인이 들려주는 숲과 인생의 이야기는 백미다. 옛 소요 철학자들처럼 느릿느릿 숲길을 걸으며 그가 들려주는 나무들의 생태와 특성에 대해 귀 기울이다보면 그것이 곧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개가 늦었지만 이 고택의 주인은 한때 공연기획자와 문화 행정가, 그리고 대학교수로 이름을 드날렸던 홍사종씨다. 생의 전반부를 도시에서 숨 가쁘게 보낸 그가 요새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자신의 옛집 옥란재로 돌아와 사랑방 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옥란재에 들어앉고부터 그 집은 풍광 좋고 유서 깊은 고택으로서뿐 아니라 조용한 문화 운동의 구심체로 떠오르고 있다.

이어령 선생이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의 하나라고 말했듯 이 옥란재의 젊은 주인은 고택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지랖 넓은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가 이끌고 있는 단체만도 미래상상연구소를 비롯, 우리 숲 연구회와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모임, 그리고 모세혈관 문화운동과 극장을 떠난 바보음악가들의 후원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지난 6일에는 그동안 그가 후원해왔던 바리톤 우주호와 ‘극장을 떠난 바보음악가’들의 행사가 있었다.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이 음악가들을 후원해 왔던 ㈜세실의 이원규 회장이나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서인수 ㈜성도ENG 대표, 성일종 ㈜엔바이오컨스 대표, 우성화 티켓링크 부회장,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법무법인 태평양의 황의인 변호사를 비롯, 영화감독 임권택과 철학자 이명현 등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와 우주호와 바보음악가들을 성원했다. 그날 밤 사회를 맡은 테너 유현국의 소개에 따르면 이 젊은 음악가들이 그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극장보다는 양로원과 보육원, 농어촌과 공장지대를 돌며 수백회의 공연을 하게 된 데에는 옥란재 주인 홍사종씨가 주입해 준 음악철학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극장으로 오라는 것이 아닌, 삶의 일터로 성악가가 찾아가는 이 바보 음악가들의 행진은 그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감동의 파장을 일으켰다.

요새 옥란재의 주인은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와 우리 숲 가꾸기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라 해도 가만 보면 그가 펼치는 운동들의 탯줄은 대부분 그가 나서 자란 옥란재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땅과 숲, 생명과 사랑, 그 위에 음악과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에 물 주고 싹 틔워 자라게 한 것이 옥란재였던 것이다. 때로는 기발해 보이고 때로는 생뚱맞아 보이는 그의 상상력의 젖줄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직접 감자와 고구마와 토란을 심고 캐며 집주인은 땅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고 닭을 치고 꿀벌을 치며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학습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양 홍문의 오래된 고택 옥란재와 그 땅은 주인에게 말없는 교사였던 셈이다. 주인에게뿐만 아니라 그 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삶의 지혜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사인 것이다.

옥란재는 사철이 다 아름답지만 역시 가장 아름답기는 생명이 움트는 봄이다. 온 산이 불타듯 꽃으로 뒤덮이는 옥란재의 봄이야말로 장관이다. 추운 겨울을 지내는 동안 나는 마음의 고향 옥란재의 봄을 꿈꾼다. 오는 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철쭉과 진달래와 애기똥풀과 종달새가 벌써부터 설렘으로 기다려진다.

[[김병종 / 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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