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文化데이트>“창조적 번역 통해 ‘한국 정신의 수출’ 힘쓸 것”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원로 독문학자인 문학평론가 김주연(68)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한국문학번역원장에 취임했다. 김 원장은 1970년 고 김현,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김병익 전 문화예술위원장 등과 함께 순수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 동인. 약칭 ‘문지’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약칭 ‘창비’)과 함께 한국 문단을 이끌어온 쌍두마차다. 창비가 참여적 경향을 보였다면, 문지는 순수문학의 옹호에 앞장섰다. 한국문학번역원이 한국 문학 해외 발신의 중심인 만큼 향후 한국 문학 발신의 방향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김 원장을 만나 한국 문학과 세계 문학, 그리고 번역 문학에 대해 들었다.

먼저 세계화의 진행과 더불어 영어 제1주의에 밀려 제2외국어가 완전 사양길에 들어선 현상에 대해 물었다.

김 원장은 “학생들이 독문학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며 “학부제에 의한 폐해”라고 주장했다.

“중·고교에서 대학 가는 공부만 하지,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막연한 고정관념에 공부 잘하면 법학, 의학, 경영학과에 가는 등 실용적인 전공에 몰려듭니다. 특이한 극소수만이 선택을 하는데 학문의 연속성, 다양성을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영어의 중요성은 인정했다. “요즘 파리에서도 영어가 통하는 추세”라며 미국 중심의 세계화 흐름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프랑스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프랑스가 문제”라며 “20세기 후반 들어 전통적인 활자문학이 동요하고, 영상문화에 밀려 문학의 내용이 동요하는 것은 모두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다. 프랑스와 독일이 한국과 일본처럼 사이가 안 좋다더니 독문학, 불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그런가 보다.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원해 모든 사람이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증상적인 현실에 먼저 집착하게 됐습니다. 차분한 점검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이제 폭력, 섹스, 엽기가 아니면 문화가 아닌 게 됐어요.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두 군데인데 바로 (전반적 문화예술의) ‘해체사조’와 영상문화입니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기존의 벽을 해체, 영역을 넓혀 좀 더 넓은 새로운 경계를 세우자는 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자, 김 원장은 “데리다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증상만 적용한 우리 현실의 문제”라고 수정했다. 그러면서도 김 원장은 “내가 언제 실력이 있다면 ‘정신 빠진 데리다’라는 책을 내 그의 이론과 더불어 한국의 문화현상을 정식으로 비판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주요 수단으로 하는 영상매체의 발달로 정보의 인식방법도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영어단어를 ‘손으로 쓰면서’ 외우지 않고 ‘눈으로 보면서’ 외운다. 여러번 ‘쓰며’ 자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찍으며(클릭)’ 눈으로 ‘익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요즘 문화는 ‘명멸(明滅)’합니다. ‘각인(刻印)’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기는 각인은 활자문화의 영역이고 스쳐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명멸은 영상문화의 영역입니다. 각인의 시대가 명멸의 시대로 바뀌는 거지요. 학문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웨이브(wave)를 타기 대문에 비관만 하지 않습니다. 옷도 버리지 않고 한참 갖고 있으면 다시 입을 수 있지 않습니까.”

김 원장은 “그런 징조도 있다”며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한 것을 디지털이 보완하는 상보적인 관계임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원장은 인터넷의 무분별한 남용에 따른 해악에 대해 우려했다.

“개인적 소견인데 사람한테는 어떤 문화적인 스크린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속성은 위험합니다. 자기 검열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유혹을 받게 돼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은 문명, 제도 자체를 공격하는 데 쓰이고 있어 더욱 걱정입니다.”

그는 이 같은 현상을 문학판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공지영 작가 같은 경우는 그래도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있어요. 그런데 L, P, B 등의 것은 과연 전통적 개념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논의에 부쳐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소설은 시대의 산물인 만큼 이들 작품이 소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팩션(faction·fact+fiction·사실에 근거한 허구), 칙릿(chicklit·chick+literature·‘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 시티’와 같은 20대 젊은 여성을 겨냥한 영미소설), 퀴어(queer·동성애), 엽기 현상이 너무 앞서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 원장은 “이들 소수자의 하위문화가 더 이상 하위문화가 아니라 중심문화가 되다시피 한 것이 더욱 문제”라고 개탄했다.

“우리 문학은 세대교체가 너무 빨라요. 클래식이나, 미술 등에서는 아직 경륜이 중심에 서 힘을 갖고 있는데 가요나 문학판을 보면 ‘방정맞다’고 할 정도예요. 몇 달 나갔다 오면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니까요.”

김 원장은 “과거 문화예술진흥원, 문화예술위원회 등의 창작인 무작위 양산 체제도 문제”라며 “어떤 특강에서 시인이 한 5000명 된다고 말했더니 객석에서 2만명이라고 수정해줄 정도였다”고 밝혔다.

“문예지, 시잡지가 대체 몇 종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전문적 비판이 개입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비평도 정당한 비판보다는 해설이 되고 맙니다.”

김 원장은 “작품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평론은 작품을 비추는 거울인데 지금 평론이 실종됐다”고 한탄했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이 안 나온다고 말하며 번역이 문제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물론 번역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이 번역이 안 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최근 노벨상 수상 경향을 보면 새로운 형식의 창조가 돋보이는데 우리는 그런 새로운 형식에 담은 보편적 주제, 지역의 독창성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김 원장은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로서의 본질적 대답과 번역원장의 (현실적)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힘들게 말을 꺼냈다.

먼저 문학평론가로서 “누구누구를 들어 대외용으로 말할 수 있지만 40년 가까이 문학비평을 해온 나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그 작품을 본 외국 평론가들이 ‘이 정도면 한국 작품은 볼 필요도 없군’이라고 말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라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 특히 소설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이를 훌륭하게 번역해야 하는 게 숙제인데 원문 그대로 직역해야 한다는 ‘아카데믹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역이 많은 셰익스피어 번역가로 빅토르 위고가 꼽히는데, 또 가장 훌륭한 셰익스피어 번역가 역시 위고로 평가된다. 김 원장은 “현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의역을 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독일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 성공한 게 바로 그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경제가 어렵다. 이 경우 문화의 위축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문학의 위기는 오래전에 진행돼 한층 더 어려움이 예상된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독일 사회와 문학, 문화가 좋은 참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기 독일은 정치, 경제적으로 낙후된 유럽의 지진아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위대한 괴테가 나왔고,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가 나왔습니다. 문학에는 그 모든 상황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바깥의 절망적인 현실에 문학은 오히려 강한 자부심으로 이를 창작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번역문학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한국 문학의 세계 발신, 더 나아가 한국 문화예술의 세계 발신이 바로 우리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번역문학원이 앞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에 대해 물었다.

“번역원은 한국 문학의 수출 전진기지입니다. 디지털시대, 영상시대에도 문학은 여전히 활자와 책으로 이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 수출’ ‘사고의 수출’이라는 매우 어려운 작업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번역원을 중심으로 그동안 많은 노하우가 축적됐고, 나름의 소프트웨어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나열식을 지양, 보다 집중적인 시각에서 선택적으로 운용할 겁니다.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지만, 결국은 탁월한 몇몇 작가들이 문학사를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김 원장은 “아울러 문화 융합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 문학을 포함한 문화출판물들의 번역과 수출에도 관심을 갖고 활자·인쇄의 선진 강국이었던 전통을 해외에 널리 선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주연씨는…

▲1941년 서울 출생 ▲1960년 서울고 졸업 ▲1964년 서울대 문리대 독문학 학사, 1968년 석사, 1981년 박사 ▲1969~1970 미 버클리대학원 수학, 1970~1971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수학 ▲1966년 ‘문학’에 문학평론 당선 ▲1978~2006년 숙명여대 교수 ▲1986~1987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객원교수 ▲수상:1990년 제2회 김환태 평론상(문학사상사), 1991년 제2회 우경문화저술상(파라다이스 문화재단), 1995년 제6회 팔봉 비평상, 2004년 보관문화훈장 ▲저서:독일시인론 (1983년 열화당), ‘독일문학의 본질’(1991년 민음사), ‘독일비평사’(2006년 문학과지성사), 평론집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1993년 현대소설사) ‘사랑과 권력’(1995년 문학과지성사) ‘가짜의 진실, 그 환상’(1998년 문학과지성사)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2002년 문이당) ‘근대논의 이후의 문학’ (2005년 문학과 지성사) 등.

문화부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