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文化데이트>“약자에 더 배려해야 사랑과 희망의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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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연극 ‘엄마는…’에서 박정자(왼쪽)씨가 화장실에 앉아 딸 역의 서은경씨와 수다를 떨고 있다.

어려울 때 흔히 그렇듯 요즘 문화계에는 ‘어머니’가 대세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5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강부자씨가 주연한 연극 ‘친정엄마2’도 밀려드는 관객을 감당치 못해 앙코르 공연을 거듭하다가 최근 막을 내렸다. 독립영화의 기적을 만들어낸 ‘워낭소리’도 30살 된 소가 부각됐지만 사실 그 소는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다. 극단 산울림이 40주년을 맞아 지난 24일부터 서울 신촌 산울림소극장에서 감동의 어머니 연극 고정 레퍼토리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5월10일까지·02-334-5915)를 무대에 올려 어머니 신드롬을 이어간다.

이 작품이 초연된 1991년부터 주연을 맡고 있는 한국의 대표 여배우 박정자(67·사진)씨를 25일 공연이 끝난 무대에서 만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요즘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 여배우의 문건의혹 사건은 보너스로 물어봤다.

1시간40여분 동안 거의 퇴장없이 열띤 무대를 이끈 배우답지 않게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2007년 ‘신의 아그네스’ 공연 때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요즘 정극을 기피, 콘서트 등으로 ‘외도’를 한다는 연극계 입방아가 낭설인 것도 같다고 하자 박씨는 “의외의 반응”이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했다.

“‘외도’라니요, 평생을 연극배우로 살아왔습니다.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 연극배우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제가 무용하는 친구의 무대에도 서고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시를 읽고 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박씨는 이어 “사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거 박정자 아니면 누구도 못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도전한다”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작품도 그래요. 19년째 하는 작품이어서 잠꼬대로도 할 수 있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겁이 나요. 그러나 아직 하고 싶은 것 많아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그거 꼭 해야 해요.”

만 예순일곱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다. 딸 역의 배우 서은경씨를 압도하는 에너지로 열연하고 지치지 않는 젊음의 비결이 궁금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것, 관객과 만나 연극하는 것”이라며 “골프 같은 운동은 필요없다”고 잘라 말했다.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나는 결국 그 채널(연극)을 통해 호흡합니다. 연극은 제 삶 자체입니다. 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주변에서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죽으면 다 쉰다”며 “이제야 말로 쉴 틈 없이, 건강을 위해(?) 열심히 해야 할 때”라고 강변했다.

이 작품이 19년째 해마다 다시 무대에 오르면서 감동을 주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가 서로 위로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지요. 이 작품은 딸이 엄마하고 미처 나누지 못했던 애-증(‘증(憎)’에 악센트가 들어갔다)까지 포함합니다. 딸이 그것을 독백, 소설의 형식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맥락이지요. 하지만 연극은 인물을 복원합니다. 엄마의 이미지, 삶 그 자체를 복원하는 겁니다.”

박씨는 “이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가 된다”며 “엄마도 과거에는 딸이었다. 돌고 도는 이 테마는 영원불멸”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도 그렇지만 요즘 어머니가 대세다. 어려워서 그런가. 외로워서 그런가. 현대 도시인에게 어머니는 생물학적 의미 이상의 문학적, 예술적, 철학적 더 나아가 종교적 의미까지 갖는 것 같다.

“종교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나이가 무척 많이 든 지적인 할아버지가 몸이 힘들 때 어머니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엄마, 어머니는 분명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찾는 구원의 대명사입니다.”

박씨는 그러나 “문제는 살아계셨을 때는 별로 못 느끼고, 돌아가신 다음에 뉘우친다는 것”이라고 꼬집으며 “나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딸노릇을 못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주 찾아 봬야 할 텐데 하면서도, 그땐 참 할 일이 많았어요. 핑계가 많았던 거지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막내야 보고 싶다. 언제 올래’ 하면 당장 가야 옳은데 ‘지금 바빠’ 어쩌고저쩌고 하며 ‘나중에 갈게’ 하고 끊습니다. 정말 인색하지요. 그런데 지금 다시 딸 노릇을 하라고 해도 그대로 할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어쩔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박씨는 갑자기 생각난 듯 “어머니가 이 작품을 처음 보러오셨을 때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했는데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큰 박수로 호응, 딸 노릇을 한 번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 역을 한다는 게 정말 부끄러웠어요. 그래도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어머니가 뭐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더니 ‘넌 부끄럽지도 않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치마를 훌떡 걷고 볼일을 보며 이야기를 하니’라고 꾸짖는 거예요. 극에 몰입, 현실과 혼동하는 거지요. 그래도 이것은 약과였어요.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굿나잇 마더’에서는 공연이 끝난 뒤 딸 역을 맡았던 연운경씨를 마구 때리기도 했어요. 박정자 가슴을 아프게 했다는 거지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그렇게 맹목적인 것 같아요.”

박씨는 “딸 역할도 제대로 못했지만 어머니 역할도 낙제”라며 “시집도 못보내고, 요리도 못하고 그러니 연극이라도 잘 해야지”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작품에서 박씨가 화장실 문을 열고 천연덕스럽게 치마를 걷어올리고 볼일을 보며 수다를 떠는 장면은 정말 질박한 한국적 어머니상이다. 이 장면 하나로 개인주의적인 프랑스 심리극이 가족 중심의 사실적 한국 연극으로 완성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흉내만 내서는 연기가 안됩니다. (연출자) 임영웅 선생께서 (무대미술가인) 박동우 중앙대 교수에게 화장실을 옆으로 해서 구석에 내려고 했어요. 제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지요. 그때 ‘아니다, 관객이 ‘직빵’으로 보는데 내달라’고 했습니다.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어요. 무대에서 체면차리고 해서 무슨 작품이 되겠어요.”

흉내만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속옷을 내리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일급 비밀”이라며 입에 손가락을 댔다.

“‘11월의 왈츠’라는 연극을 할 때였어요. 어느 평론가가 굉장히 나쁘게 썼어요. 그런데 관객이 미어터졌습니다. 그때 저는 또 하나의 너울을 벗어던졌습니다. 내가 연극을 한다고, 예술하는 척했던 것이 아닌가. 도를 넘어서지 않는 한, 관객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중요하다. 품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말을 좀 돌렸다. 요즘 장자연이라는 여배우의 문건의혹으로 한국 사회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데 연극은 물론 방송, 영화에서 두루 활동한 한국 대표 여배우로서의 의견을 묻자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사회가 성숙하기 위한 진통”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뉴스를 자세히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너무 갑자기 잘 살게 됐다고 할까요, 삶에 거품이 너무 많이 낀 것 같아요. 진실되지 않으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들이 자라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단순 스캔들로 생각하지 말고 자기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당사자는 말도 못하고 부끄럽고 얼마나 덜덜 떨었겠어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못된 거품을 걷고 다른 사람에게 더욱 많은 배려를 해야 합니다. 특히 사회지도층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 권력과 금력으로 군림하려 들지 말고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많은 배려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사랑과 희망이 생기겠지요.”

박씨는 명배우답게 금세 표정을 바꾸고 “과거는 거름”이라며 “현재가, 미래가 더욱 중요하다”고 희망을 강조하며 소녀처럼 홍조를 띠고는 꿈꾸듯이 앞으로의 희망을 말했다.

“다른 사람의 삶은 모르겠고요, 저는 우선 80까지 해야 할 무대가 있습니다. (연극 ‘19 그리고 80’인데 평소 그는 80세까지 이 작품을 하겠다고 말해왔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80은 나를 완성시키는 나이입니다. 80이 기다려집니다. 물론 때론 겁도 납니다. 아프지 않고 무대에 서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 80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박정자씨는…

▲1942년 인천 출생 ▲1961년 서울 진명여고 졸업 ▲1963년 이화여대 신문학과 3년 중퇴(동아방송 성우 1기 입사) ▲1963년 동인극장에서 ‘악령’으로 연극 데뷔 ▲1966년 극단 자유 창립단원 ▲1996년 제3대 한국연극배우협회 부회장 ▲1997년 문화비전 2000위원회 위원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이사 ▲2005년 연극인복지재단 초대 이사장 ▲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수상 : 백상예술대상(1970), 대종상 여우조연상(1985), 보관문화훈장(2007) 등 ▲저서 :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예음) ▲대표작 : ‘따라지의 향연’ ‘대머리 여가수’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파우스트’ ‘신의 아그네스’ ‘뮤지컬 넌센스’ ‘피의 결혼’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19 그리고 80’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 등

문화부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