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文化데이트>“‘문화재 → 문화유산’ 용어 바꿔 개념 확대해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임정현기자 theos@munhwa.com

한국사회에서 원칙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 문화재위원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그 누구와도,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권력은 물론 헌법보다 위에 있다는 ‘여론정서법’도, ‘여론정서법’보다 더 무섭다는 ‘떼법’도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이라는 오해도 받는다. 하지만 이해는 간다.

문화유산은 한번 훼손되면 원상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화유산은 당대의 소유가 아니라 후손을 위한 것인 만큼 활용보다는 보존에 더 힘을 써야 하는 것이 사실 옳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고궁을 마음껏 산책하며 뮤지컬도 보고 싶고, 울릉도며 독도, 제주도 등 귀한 자연유산을 즐기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이인규(73) 신임 문화재위원장의 바쁜 일정에 억지로 2시간 ‘구멍’을 내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딜레마를 비롯해 한국 문화유산 전반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1964년 문화재위원회가 탄생한 이래 자연과학자가 문화재위원장이 된 것은 이 위원장이 처음이다. 문화재위원회가 45년만에 ‘과학적’이 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조크에 이 위원장은 껄껄 웃으며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으로 본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문화재는 고궁, 매장문화재, 그림, 절이나 건축물이 중심이었습니다. 천연기념물분과가 ‘계’에서 ‘과’로 승격한 것도 2002년입니다. 하지만 문화재에서 자연유산과 천연기념물의 중요성과 사이즈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윤선도 고택은 고택 자체만으로가 아니라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울려야 그 진가가 살아납니다. 옛날 문화재의 개념이 점이었다면 이제 점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확대되는 겁니다.”

이같은 과정에서 그동안 역사, 미술사학자 등 인문학자 중심이었던 문화재위원장에 자연과학자가 임명된 것은 균형을 맞추는 차원이 아니라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설명으로 이해된다.

이 위원장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우선 ‘문화재’라는 용어를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라는 것이 원래 일본말입니다. 영어로는 컬추럴 프로퍼티(cultural property)인데 협의로 구왕실의 재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계는 컬추럴 헤리티지(cultural heritage),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방대한 그 나라의 자연유산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원장은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며 “문화재청을 ‘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회를 ‘문화유산위원회’ 등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물학과를 생명공학·유전공학과로, 전산학과를 컴퓨터·정보통신 즉 IT테크놀로지학과로 바꾸니 우수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지원했고, 학과는 또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법령도 바꿔야 하고 복잡한 일이 많이 있겠지만 문화유산을 잘 보존, 활용하기 위해 정확하면서도 폭넓은 개념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자연과학자, 특히 진화생물학자가 신임 문화재위원장이 돼서인지 가장 먼저 나오는 뉴스가 ‘제비가 천연기념물이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아직 발표할 때가 된 것은 아닌데 ‘문화재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예를 들며 출입기자들과 첫 만남에서 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커져 버렸다”고 설명했다.

“사실 한번 문화재로 지정되면 끝없이 계속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희귀물도 번성해서 문화재적 가치를 잃으면 지정을 취소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원앙새입니다. 수달도 꽤 많아졌어요. 그런데 그랬다가 혹시 잘못될까봐 취소를 않는 거예요. 이제 지정가치를 잃은 것들은 취소하고 제비나 참새와 같이 과거에는 흔했지만 현재는 보기가 힘들어진 그런 것들을 지정해야 합니다.”

문화재가 나오면 사실 해당 지역 주민이나 사업자는 골치가 아프다. 전체 국민 차원에서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재산권 행사나 사업 진행에 차질이 크기 때문이다. 풍납토성내 주민들은 10여년째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부고속철은 도롱뇽 때문에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나 천연기념물 국가지정에 대해 사유재산침해로 거부감이 심합니다. 권위주의시대에는 ‘해’하면 됐지만, 지금은 당치않은 이야기입니다.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현재 4500여억원인 문화재청 예산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유산개념으로 바꾸어 주민과 친숙해지게 하는 한편 문화재 지정이 해당주민의 삶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위원장은 최근까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한국회장을 맡으며 제주도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게 된 과정을 예로 들었다.

“처음에 제주도민에게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대해 설명하러 갔다가 2시간 동안 설명회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세계자연유산 지정과 관련,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관계자들도 이 점을 가장 심각하게 우려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고, 우리가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취소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관광수입 등 이익은 주민들의 몫이 될 것이라고 꾸준히 설득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나중에는 50만 제주도민의 3배가 넘는 150여만명이 서명, 유네스코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섬이야기가 나오니 섬 자체가 천연기념물인 독도가 빠질 수 없다. 세계적인 조류(藻類)학자로 1957년부터 독도를 현장 연구했던 이 위원장은 지난 정부에서 문화재청의 독도개방에 가장 앞장서 반대했다.

“독도는 제주도와 상황이 다릅니다. 일본하고 부딪칠 때마다 독도 개방이야기가 나오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 국가가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법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암반섬인 독도는 1년에 1, 2개월 밖에 머물 수 없어요. 더 많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더 큰 배를 띄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접안 시설도 늘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면 위험하니 안전시설도 많이 해야 해요. 먹을거리 시설은 물론 생태공원 등 볼거리 시설도 만들어야 하니 독도가 제대로 남아나겠습니까. 독도는 독도답게 보존해야 합니다. 감정에 치우쳐 인위적으로 독도에 해를 끼치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융통성있는 합리적 실용주의자로 보였던 이 위원장은 독도 부분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완고한 ‘문화재위원’의 모습으로 바뀐 것 같다. 이에 대해 그는 “이자만 이용해야지 원금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인간과 생물권(MAB·Man and Biosphere)회의가 열렸습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침략적으로 다뤄서는 미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1992년 지구온난화 방지와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브라질 리우선언으로 구체화됐습니다. 간단히 말해 지구가 갖고 있는 자원을 은행에 넣어두고 원금을 훼손하지 않고 이자를 쓰자는 겁니다.”

이 위원장은 “지금 제비나 참새 말고 우리 주위에 벌써 없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으냐”며 “흑돼지 유전자의 경우 일본이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혈통보존은 수구적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잡종이 되면 오리진(origine·종자)이 없어집니다. 리사이클(recycle, 교배·재생)해 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종자까지 말살시켜서는 안됩니다. 세계화한다고 하며 고유한 민족문화를 다 없애자고 하는 잘못과 똑같은 겁니다.”

그는 “앞으로 생물자원 주권시대가 될 것”이라며 “브라질이나 호주 같은 메거다이버시티(megadiversity·초거대종다양성) 7개 국가가 현재의 G7과 같은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이 위원장의 강조에도 불구, 이번에 문화재위원 수가 120명에서 80명으로 줄고 산하 분과가 축소돼 위원회의 영향력이 약화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는 “해당 학문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다른 분야에까지 안목이 넓은 분들을 중심으로 더 소수정예가 돼야 한다”며 “무보수 명예직에 걸맞게 국민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끌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인규 위원장은…

▲1936년 부산 출생 ▲1954년 부산고 졸업 ▲1960년 서울대 문리대 식물학과 졸업 ▲1962년 서울대 대학원 식물학과 석사 ▲1968년 일본 북해도대 이학부 식물학과 박사 ▲1969~2001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 ▲㈔자연보호중앙협의회 명예회장 ▲1991~1997년 한국조류(藻類)학회 회장 ▲1996~2006년 아시아·태평양국제조류학회 회장 ▲1997~2000년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

▲2001~2002년 국립환경연구원 생물다양성 센터장 ▲2004~2009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한국회장 ▲2005~2008년 한국보호지역포럼 위원장 ▲수상 : 대한민국 과학기술상(과학상) 대통령상(1995), 미국 조류학회 어워드 오브 엑셀런스(Award of Excellence)(2001), 옥조근정훈장(2001),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학술부문 대통령상(2006) ▲저서 :‘일반생물학’ ‘교양생물학’ ‘한국식물분류학사개설’ ‘현대생물학’

편집국 부국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