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서툰 손놀림이 ‘달인’으로… 장애인 홀로서기 꿈 이루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사회적 기업 동천 직원들이 제작한 모자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고 있다. 정하종기자

발달장애인 이범석(38)씨는 요즘 입을 귀에 걸고 다닌다. 이씨는 “장가를 가고 싶다”는 말을 동료들에게 부쩍 자주 하고 다닌다. 아직 여자 친구도 없고, 결혼을 약속한 배우자도 없다. 하지만 부모님이 “돈을 많이 저금하면 장가갈 수 있다”는 말을 했고 이때부터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씨는 “(월급의)반은 저금을 하고, 반은 집에 계신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린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씨는 멀쩡한 외모 탓에 얼핏 보면 ‘이 사람이 왜 장애인일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걸어 보면 웬만한 집중력 없이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씨는 이 취업난 시대에 어엿한 직장인이다. 이씨도 적지 않은 장애인들이 그렇듯 서른이 넘도록 주로 집에서만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보호자 프로그램을 접하게 됐고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4년전 집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인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모자전문제조업체인 ‘사회적 기업 동천’에 취업을 했다. 출퇴근도 혼자 버스로 한다.

지난 15일 이 회사를 찾았을 때 이씨는 1층 작업장에서 동료 20여명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만드는 여러 공정 중 모자에 구멍을 뚫는 프레스를 담당하고 있다. 모자 1개에 2개의 구멍을 뚫어 똑딱이 단추나 모자 뒷부분 조임새를 다는 일을 한다. 그의 손을 거친 모자가 큰 테이블로 넘겨지면 다른 장애인들이 쪽가위로 실밥을 끊는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처음엔 프레스를 다루는 게 서툴러 손을 다치거나 날카로운 모자 조임새에 찔리기도 했다. 집중력 부족으로 구멍 위치를 잘못 뚫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베테랑이 됐고 하루에 구멍을 뚫는 모자가 700~800개가 넘을 때도 있다.

이씨는 이 회사에 출근하기 전 한 장애인시설 재활프로그램에 다니면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한달에 고작 몇만원 정도를 받았지만 자신도 일할 수 있고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고 자신감도 되찾았다고 한다. 2007년부터 이씨는 이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이 회사에서 받는 월급은 전에 일하던 곳보다 몇배나 많다. 그가 한달 일하고 받는 돈은 일반인에겐 최저임금수준(86만원)이지만 그에겐 너무나 크고 소중한 돈이다.

동천에는 63명의 직원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이씨와 같은 장애인은 40명으로 모두 생산직에서 일하는 어엿한 직업인들이다. 이들 중에는 지능이 50~70에 불과해 사회생활이 어려워 보이는 발달장애인들도 있고 지체장애인들도 섞여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비장애인들보다 더 능숙한 솜씨를 갖고 있는 ‘베테랑’들도 많아 생산한 모자의 품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들이 생산한 모자는 ‘컨버스’ ‘헤드’ ‘뉴발란스’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 브랜드가 많다. 그래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모자를 납품하고 있지만 반품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원들 스스로가 장애인이 만든 모자라는 부정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해온 덕이다.

그결과 동천은 하청업체를 포함해 국내 모자 전문 생산업체 30여개 중 매출액 기준으로 5~7위권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체국, 국방부, 한국전력 등 정부 및 공기업에 모자를 납품하는 전문기업으로 자리잡아 지난해에는 34만여개의 모자를 납품해 20억원의 판매액을 기록했다.

이 회사에서 장애인 사우들을 보살피고 있는 사회복지사 박수영(29) 팀장은 “장애인들이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직업의식이 남다른 것 같다”며 “일반 장애인들과는 달리 눈빛이 살아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고 치켜세웠다. 박 팀장은 “이들 중 건강상의 이유나 개인적 이유로 그만둔 경우는 있지만 일하기 싫어서 그만둔 경우는 아직까지 없다”며 “그만큼 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말했다.

박 팀장을 비롯, 3명의 동료 사회복지사들은 늘 장애 사우들을 따라다니며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한다. 사실 장애 사우들이 처음부터 일을 잘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는 이들을 고용한 뒤 장애 정도나 개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맞춰 꾸준히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프로그램에는 기술과 안전교육은 물론 재테크, 은행 입출금 및 대출 방법, 심지어 옷 입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들이 두루 포함돼 있다. 단순한 직업교육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희망교육’인 셈이다.

이들은 일단 3개월의 훈련기간을 거친 뒤 능력에 맞는 공정에 투입된다. 모자의 경우 17가지 공정이 있는데 이 중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공정에 배치되는 것이다. 가위나 쪽가위 사용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데 같은 지적장애인도 간질이 있을 경우, 기능 평가를 해서 일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모두 즐거워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서연(32) 사무국장은 “장애인 중 상당수가 기초수급자인데 직장을 갖고 월급을 받다 보면 기초수급자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도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을 줬는데 해마다 월급이 올라 혜택이 박탈되는 경우다. 그래서 김 국장은 “장애인들이 힘들게 교육을 받아 직업을 얻었는데 수입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격을 박탈하는 현 장애인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천도 고민이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는 노동부의 사회일자리지원금 3억원을 받을 수 없어 설비시설 등 재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연히 장애인 추가 고용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김 국장은 “일하려는 장애인이 많지만 고용시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장애인을 배려할 수 있는 시설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명식기자 ms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