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렇게 엄숙할 필요가 있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심만수기자

류근(44) 시인은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지만 그 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라졌던 그가 18년 만에 첫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을 들고 돌아왔다. 20년 가까이 쓴 시들을 추려 등단 18년 만에 첫 시집을 낸 것도, 아무런 시 이력이 없는 시인의 첫 시집이 선정이 까다로운 문학과지성 시인선으로 나온 것도 놀랍다. 긴 공백에 대해 그는 시 쓰기가 어려웠고, 사는데 바빴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1992년 당시 군대를 갔다 온 늙은 중앙대 문창과 3학년이었던 그가 “시가 너무 안 써진다”며 괴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반가움에 펼쳐든 시집에는 상처와 허무한 삶이 흐르고, 그 절망을 견디려는 듯 헤어짐과 그리움을 반복하는 사랑과 연애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흔히 다친다/내가 기억하는 노래/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상처는 내가 바라는 세월” (상처적 체질)

저녁 연기와 가파른 사랑에 다치는 ‘상처적 체질’은 아마도 시인인 듯하다. 그런 체질의 시인은 “우산을 들고 외출했다가/막상 비가 내리면 택시에 우산 두고 내리는 것’(세라비)이 삶이라면서도,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독백)며 사랑을 맞고,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눈이 내린다/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폭설)라며 사랑을 보낸다. 하지만 이내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그리운 우체국)라며 속절없이 그리워한다.

자신의 시에 대해 “3류 통속 트로트 연애시”라는 시인은 “세상이 그렇게 근엄하고 엄숙할 필요가 있나.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지붕이 낮은 연애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시집의 감성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하룻밤 노래 가사 20여개씩을 써대던 대학 시절의 최고 히트곡인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정서와 닿아있다. 문학평론가 최현식씨도 해설에서 “처량하게도 용도폐기한 ‘감상’이 오히려 힘이 된다”고 평하고 있다. 쿨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죄가 되고, 넘치는 감상은 통속으로 치부되는 세상 속에서 그는 세상은 어쩔 수 없는 통속이라고, 그 통속이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이런 정서는 이야깃거리 많은 그의 삶을 비춰내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홍보실에서 일하다 훌쩍 인도로 여행을 떠났던 그는 그곳에서 이제 농사를 지으며 시만 쓰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와 횡성에서 고추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동료의 제안으로 휴대전화 벨소리 다운로드 회사를 차렸고, 3년 만에 코스닥 상장에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스트레스와 “이렇게 살다가는 시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강박 끝에 공황장애에 걸렸고, 결국 4년 전 회사를 정리하고 시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제 다시 늙은 중앙대 문창과 대학원생이 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시인이 꿈이었고, 대학생 시절 김현 선생의 글이 너무 좋아 김현 선생의 비평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내는 것이 목표였다”며 “내 삶의 긴 시절을 이제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최현미기자 chm@munhwa.com
사진 = 심만수기자 panfocu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