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위계와 소통

  • 문화일보
  • 입력 2010-04-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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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보야, 밥먹자!” 2002한일월드컵을 앞둔 축구 대표팀 식당. 팀내 최고참 홍명보 선수에게 한참 나이 어린 후배가 툭 던진 말에 좌중엔 폭소가 터진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부임 후 “그라운드 안에서는 모두 반말로 하라”고 지시했다. 기존 선후배 의식으로는 20대 초반의 미드필더가 경기 중 30대 공격수에게 지시하는 게 껄끄럽다. 경기력을 떨어뜨리는 단서를 간파한 것이다.

지난해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 세계 8강을 이룬 홍명보 감독은 거꾸로 어린 선수들에게 존댓말을 썼다. 또 다른 발상으로 감독-선수 간 벽을 허물겠다는 취지다.

월드컵 4강 신화 직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외국인 영입 성공 사례로 히딩크와 함께 또 한 사람을 주목했다.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던 데이비드 그린버그다. 델타항공 출신의 그가 2000년 1월 임명됐을 당시 대한항공은 미 국방부가 직원 탑승을 금지시킬 만큼 안전평가에서 최악이었다. 2년 만에 그런 평판을 바꿔놓은 처방은 히딩크 발상과 닿아 있다. 조종사들에게 영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다.

발단은 1997년 8월의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다. 당시 부기장은 심각한 징후를 포착하고도 기장에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조직 특유의 위계질서 탓이다. 통념과 달리 부기장이 조종석에 앉을 때, 기장이 조종간을 잡을 때보다 사고가 줄어든다고 한다. 경험이 더 많은 조종사가 옆에서 거리낌 없이 조언할 수 있어서다.

사회학자 기어트 홉스테드는 위계질서 존중 정도를 나타내는 ‘권력간격지수(PDI)’를 고안했다. 1990년대 세계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평가한 PDI 1위는 브라질, 2위는 한국, 3위가 모로코였다. 이 순위는 국가별 비행기 추락사고 발생 빈도와 거의 일치했다. 그린버그는 영어 전용을 통해 경어체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적 위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등 정부 핵심인사들이 대거 희생된 비행기 추락사고 후 폴란드 언론은 ‘대한항공의 교훈’을 언급했다. “‘언어의 덫’에 갇힌 계급적 문화를 깨라.” 고위 관계자가 무리한 착륙을 지시했을 거라는 추정에 근거한 논평이다.

언어는 사고·행동을 지배한다. 서열이 내재된 말로는 활발한 의견 개진이 어렵다. 그렇다고 고유의 미덕인 경어 사용을 백안시하는 건 실체를 두고 그림자를 지우는 잘못이다. 위계와 소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요체다.

[[김회평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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