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짓지 않은 자에 저주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5월29일 싱가포르 에스플레네이드극장에서 열연하고 있는 서주희(사진위), 정동환씨.

어떻게 셰익스피어를 범할 것인가(How to rape the Shakespear)? 현대 연극의 화두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절묘하게 극화, 인간세계의 가능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세계 연극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한태숙씨가 쓰고 연출한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는 이에 대한 한국 연극의 의미있는 대답이다. ‘맥베스’를 5막에 한 줄 나오는 맥베스 부인의 대사를 단서로 새롭게 해석, 1998년 초연한 ‘레이디 맥베스’는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휩쓸고 2002년 세계적 권위의 실험연극제 폴란드 콘탁국제연극페스티벌에 한국연극으로는 처음으로 공식 초대되는 등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8년 서울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평론가와 관객들이 선정한 최고의 국내 연극으로 뽑혀 매진을 거듭, 추가공연까지 해야 했고, 그해 도쿄공연예술마켓에 해외작품으로 유일하게 초대되기도 했다. 또 홍콩아트페스티벌과 함께 아시아 최대의 공연예술축제로 평가되는 2010 싱가포르 아트페스티벌(5월14일~6월13일)에 한국 연극 가운데 처음으로 초청돼 지난 5월29, 30일 싱가포르 최대의 극장 에스플레네이드 극장 무대에 올라 매진되는 등 ‘레이디 맥베스’의 성가는 12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매번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레이디 맥베스’가 10일부터 20일까지 초연했던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서주희, 정동환씨를 비롯해 오브제(물체)극 연출가 이영란, 원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교수, 현대무용가 박호빈씨 등 초연 멤버 그대로 6월10일부터 20일까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시종역을 맡았던 김영민씨만 권겸민씨로 바뀌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망령된 예언의 함정에 빠져 남편을 부추겨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지만 깊은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그는 최면 등을 통해 모든 죄를 토해놓고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깊은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레이디 맥베스는 비극적 운명의 노리개가 됐지만 결코 비겁하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죄짓지 않은 것들, 저주 받으라”며 독설을 퍼부으며 죽어간다.

이 작품의 생명력은 권력과 명예, 상속 등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따른 죄의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뿐 아니라 밀가루 그림과 진흙조각 등 설치와 오브제미술, 현대화한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 씻김굿과 같은 제례의식 등 다양한 장르의 크로스오버로 버무려낸 데 있다. ‘비빔밥’처럼 각각의 구성요소의 맛이 살아있으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구수하고 달콤쌉싸래하며 톡 쏘는 매운맛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새롭다.

싱가포르 아트페스티벌에서 먼저 선보인 이번 버전은 초연의 진지함에 각 참여자의 10여년의 내면적 성숙이 더해져 작품의 완성도가 최고조의 단계에 올랐다. 극중 레이디 맥베스와 비슷한 나이에 이른 서주희씨의 연기는 왕후의 기품에 악마적 호흡과 에너지로 객석을 압도했고, 정동환씨는 환갑이 지난 배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탄탄한 몸으로 고민하는 지식인과 불안한 왕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영란씨의 밀가루 그림과 진흙 조각은 여전히 마술처럼 펼쳐졌고, 원일 교수가 조롱박으로 만든 아프리카 원조 마림바, 워터폰, 태평소 등 다양한 악기에 구음을 더해 만들어내는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대음악 콘서트였다. 박호빈씨의 춤은 스토리를 타고 오브제와 음악과 멋지게 어울렸다. 그리고 다양한 개성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권겸민씨의 유쾌한 연기는 이번 공연의 ‘신형엔진’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한태숙씨는 이 모든 ‘연극의 악기들’을 지휘, 한편의 장엄한 레퀴엠으로 조율해냈다. 02-762-0010

김승현 선임기자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