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유혹>(164)카르페 디엠(Carpe diem)-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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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순간은 열정과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누구는 중이 되고, 누구는 죽고, 누구는 이렇게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다. 윤동진의 농담처럼 자신은 정말 ‘팜므파탈’일까? 정말 남자를 멸망시키는 요물인 걸까? 그러자 클림트가 그린 나른하고 요염하게 젖가슴이 드러난 관능적인 유디트가 떠올랐다. 자신이 목을 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통을 살짝 쥔 채 입술을 반쯤 벌리고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의 고혹적인 여자. 그림 속의 유디트는 섹스의 절정에서 엑스터시를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남자들은 그런 여자에게 뇌쇄당해 죽는 줄도 모르고 죽고 싶은 것이다. 죽여줘. 그래 제발 죽여줘. 그렇게 팜므파탈에게 매달려 관능과 죽음의 엑스터시를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팜므파탈’은 하나의 성적 팬터지고 로망인 것이다.

윤동진이 유미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그런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느꼈기 때문일까? 아아, 죽어도 좋아…. 그의 피학적 상상력은 섹스의 끝에 그런 말을 흘리게 한다. 아마도 윤동진이 유미에게 ‘팜므파탈’이란 단어를 썼을 땐 클림트의 에로틱한 유디트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유미의 운명 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는 어찌 될까. 불행했던 옛 연인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결혼을 원하고 있는 윤동진과의 미래에 유미는 왠지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아아, 이게 다 황인규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탓이야. 오유미 정신 차려!”

유미는 인규와 잠시 해후한 이후로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때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파리에 있는 폴의 연락처를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다. 인규가 마무리와 뒤처리를 잘한 줄 알았는데…. 어쩌면 폴이 이유진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번 개관전에 초대된 프랑스 화가들을 통하면 그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미는 머릿속으로 그런저런 몇 가지 계획을 세우고 위스키를 한 잔 쭉 들이켰다. 빨리 과거와 결별하고 싶다. 유미는 머리를 흔들며 또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취기가 온몸을 전파처럼 빠르게 휘돌았다. 유미는 옷을 하나씩 할랑할랑 벗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클림트 그림 속의 유디트처럼 알몸에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만 걸쳤다. 앞가슴을 헤치고 옷장 거울을 향해 클림트 그림 속의 유디트처럼 표정을 지어 본다. 어느새 술기운으로 눈이 몽롱해지고 입술이 숨이 가쁜 듯 살짝 벌어졌다. 자신이 봐도 꽤 고혹적이다. 그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참수한 남자의 머리통만 없다. 머리통 대신 한 손에 핸드폰을 살짝 쥔 유미가 거울을 보며 중얼거린다.

“어느 놈이든 오늘 밤 걸리기만 해 봐. 다 죽여 버릴 거야.”

유미는 윤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동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다 되어 간다. 오마이 갓김치! 이런 젠장 덴장 간장…. 유미가 한 인기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을 흉내 내며 투덜거렸다. 윤동진은 새벽부터 가동되는 스케줄 때문인지 이 시간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와 화끈하게 한번 했으면 좋겠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런 거 하나 딱딱 못 맞춰 주니? 윤동진, 넌 아웃이야.

박 피디는 유효 기간이 지났고, 황인규도 맛이 갔다. 책상다리 같은 튼튼한 오유미의 상대들이 언제 이 모양이 됐을까. 이건 다 윤동진 때문이다. 책상다리 대신 그를 기둥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기둥서방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유미는 결심한 듯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