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여군 해병대인 해병4기 문인순(왼쪽) 할머니와 이인숙 할머니. 최근 6·25참전소년지원병전우회 서울지부 정기총회가 열린 서울 종로3가에서 기념촬영했다. 김호웅기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주여중 2학년 꿈많던 문학소녀였던 문인순(앞줄 왼쪽) 할머니가 부산 해군본부 복무 시절 울산함 옆에서 해병대 4기 동기생 여군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6월의 아침이 밝아옵니다/이 땅이 아프다고 울고 있습니다(중략)/총탄에 쓰러진 6·25 소년병들/오늘도 그 총소리 지울 수 없어/이 아침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아픈 마음 누가 쓸어주리/그날의 아픔은 오늘의 아픔/누구도 모르게 울었네/내 친구 가버린 6월에/마음이 탄다 동지를 부르며’
해병대 4기, 군번 91073. 한국 최초의 여군 해병대 출신. 17년 전인 1993년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한 문인순(77·제주시 용담2동) 할머니가 ‘시가있는 수필’(서울문학출판부) 에 수록한 ‘6월의 아침’ 시의 일부다.
제주 출신 ‘옥주(玉珠)시인’으로 불리는 문 할머니와, 군번 91067인 이인숙(77·경기 성남시 분당구) 할머니를 최근 6·25참전소년지원병전우회 서울지부(지부장 임상빈) 정기총회가 열린 서울 종로3가 한 한정식집에서 만났다.
◆총을 메고 전선에 선 꿈많던 문학소녀 =“17세 꿈많은 문학소녀였는데 전쟁통에 펜 대신 총을 잡고 입대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습니다.” 낙동강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제주여중 3학년 학도호국단 간부였던 문인순 할머니는 남자들과 똑같이 카빈총과 M1 소총, 권총분해와 실탄사격 유격훈련 등 40일간의 고된 신병훈련을 받아야 했다.
“해병대원 3000명을 모집하라는 지시가 제주에 떨어졌어요. 모집인원이 안 차니까 체육선생님이 학도호국단 간부들에게 해병대에 반강제로 지원하도록 권유했어요.”
문 할머니는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 해군본부에 내려 인사국장실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아직 앳된 소년병 학생들은 LST에 실려 배 위에서 훈련받으며 곧장 인천상륙작전 등에 투입됐다.
당시 여중생과 여교사 등 여군 입대자는 126명. 장교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병사였다. “부대 배치과정에서 일부가 울고 불며 집에 보내달라고 해 50명이 ‘고향 앞으로’ 갔지요. 저는 집에 가자니 전쟁통에 앞날이 막막하기도 하고 이왕 훈련받고 온 김에 군에 남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병사 70명 중 24명은 부산 해군본부, 48명은 진해 해군통제부로 배치됐습니다.”
부산 해군본부에 간 문 할머니는 방 1개에 24명이 새우잠을 자는 판잣집 외에 숙소가 마땅찮아 부두에 정박된 해군 함정 3층 계단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함정은 전쟁통에 식수공급이 제대로 안 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해 해병대에서 여군이 필요 없다며 훈련병들을 해군에 인계하면서부터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휘하에서 훈련받고 ‘해군밥’을 먹게 됐다. 문 할머니는 당시 식사 직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나이다’며 선창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국토의 92%가 적의 손에 떨어져 바람 앞 등잔불처럼 위태롭던 시절이었어요.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러 14세 이상 중학 2·3·4학년생과 또래 학생들이 현역병으로 군번을 받고 침략군대를 물리쳤어요. 특히 소년병들은 낙동강 전선 등에 투입돼 희생자가 많았고 살아남은 소년병들은 전쟁이 끝난 뒤 비로소 군 복무 연령이 돼 2중 병역이 부과되는 바람에 4∼5년씩 군복무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한창 공부할 때를 놓쳐 제대로 공부를 못한 소년·소녀병들은 제대 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부분 비참한 생활을 한 사례가 많습니다.”
문 할머니는 “해병대 4기 동기 중 국회의원을 지낸 고 홍병철씨의 여동생인 봉숙씨는 제대 후 가정형편이 기울어 지금도 제주도에서 사글셋방을 전전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동기들이 많다”고 말했다. 문 할머니가 1951년 5월까지 10개월간 복무한 뒤 다시 찾은 모교는 조병창으로 변해 있었다. 학생들은 소나무 밑에서 천막을 치고 비바람을 맞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못 배운 게 한이 돼 그때부터 밤을 낮 삼아 눈이 빠지도록 공부를 했습니다.” 딸 다섯과 손자 둘을 키운 할머니는 1993년 늘그막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8년 수필집을 내는 등 시인 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소년·소녀병들은 학교에서 배우던 책을 접고 펜을 총으로 갈아 잡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징집연령도 아닌 17세 이하 어린 나이에 총을 메고 최일선에서 싸우다가 이제는 다 늙어 머리가 하얘졌어요. 정부가 지금이라도 조국을 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들의 명예를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신의주학생사건 데모 후 피난 온 제주에서 여군으로 징집 =“ 신의주학생사건 시위 후 도망 다니다가 6·25 난리 통에 제주도까지 피난 와 피난민수용소 천막에서 지냈습니다. 국군징집관이 ‘빨리 고향에 가려면 군에 입대하라’고 해서 지원했어요. 1년간의 소녀병 시절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평양이 고향인 이인숙 할머니는 “정말 공산당이 싫어 자유를 찾아 부모 형제 다 두고 혼자 월남했고, 금방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입대했는데 전쟁이 그토록 오래갈 줄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1년 남짓 복무한 뒤 이 할머니는 3년간 경리부 문관(군무원)으로 근무했다. 정규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는 바람에 이후 사회복지회 신학과를 다닌 뒤 전도사로서 20여년을 지냈다.
“40일간 남자 동기생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교관이 얼마나 지독하던지…훈련받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실탄 사격할 때 M1 소총이 어깨를 팍 치는 바람에 어깨뼈에 충격이 가 멍이 들었어요. 그래서 파스를 한달 가까이 붙이고 치료를 받았어요. 유격훈련으로 무릎이 다 까지고 부서지고 손발에 철철 피가 흘렀어요. 훈련을 잠시 마치고 풀밭에서 쉬면서 누워 있는데 낙동강 전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땅이 흔들거렸지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구나 하는 공포감에 몸서리를 쳤습니다.”
이 할머니는 진해 해군통제부에 배치됐는데 통제부 안에 2층 침대가 마련된 숙소가 해군본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괜찮았다. 48명의 해군통제부 여군 동기생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거나 외국에 간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동기는 김영숙·고미자씨 등 2명에 불과하다.
이 할머니는 “당시 여자가 군대 다녀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로, 여군 경력이 결혼이나 취직에도 걸림돌로 작용해 동기 중에는 군경력을 숨기고 결혼한 경우도 많았다”며 “늦었지만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소년·소녀병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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