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사무실 부근의 한 대학 캠퍼스를 찾아 인터뷰하던 도중 폭소를 터트리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사회의 갈등 치유와 국민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인터뷰=허민 사회부장]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시대정신’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안병직(74) 이사장은 고건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과 시내에서 점심을 마치고 막 돌아오던 참이었다. “안국동의 한식당에서 와인 한잔했습니다. 고 위원장이 (진보 진영의) 백낙청씨하고 (보수 진영의) 나하고 한번씩 초대해서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해 그러자고 했습니다.”
―백낙청 교수님과 안 이사장님, 두 분은 지금 사회적 노선이 다른데도 여전히 만나서 교류를 하시는가 봅니다.
“백 교수는 나보다 두어 살 위고, 서울대 교수도 내가 두어 해 먼저 시작했는데…. 1970년도인가, 백 교수가 미국에 있을 당시 내가 창비에 쓴 글을 보고 ‘어, 이런 사람이 있나’ 하면서 연락을 해 왔어요. 그게 그 사람과 처음 알게 된 거였죠. 그리고 지금까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차이’에도 불구,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함 이상인 것 같아 보였다. “옛날부터 우리 둘은 단순한 지적 교류가 아니었어요. 백낙청씨가 앞장서 나서면 내가 뒤에서 밀어주고 그런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 생각의 차이가 나기 시작했어요.”
안 이사장은 스스로 고백하듯 한 시대를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진보 진영의 대표 학자로 살았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 안 이사장은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붕괴되고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게 그가 가진 신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가 부활을 하더라고요. 엄청나게 당황했어요.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제자를 의식화시키고 교육시켜 노동 현장에 보냈었는데….”
그에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1983년 풀빛사에서 발간된 안 이사장의 책 ‘경제학개론’. 집 안 창고 한쪽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쓰고 있던 이 책은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권의 필독서였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반봉건 사회에 머물러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미(反美)·반제(反帝) 사회주의 혁명을 일궈 내야 한다는 이론적 논거가 담겨 있는 책이다.
―기억나십니까. 경제학개론. 선생님이 쓰신 책입니다.
“…. 아! 그 책이오.”
―선생님이 쓰신 이런 책을 읽고 많은 젊은이들이 의식화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빠졌습니다. 선생님이 ‘식민지반봉건론’을 내놓았고 박현채 교수가 ‘독점자본주의론’을 내놓았죠. 그것을 바탕으로 해 운동권이 NL과 PD로 나뉘었고, 분열된 진보 진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하하….” 안 이사장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은 뒤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전 그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상적으로 돌아선 뒤로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현장으로 들어간 내 제자들을 사지(死地)에서 건져 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마구 솟아났어요. 특정 사람을 얘기해서 뭐하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내 제자요. 그가 노동운동에서 벗어나는 데 15년이 걸렸어요. 그동안 내가 계속 옆에 있었어. 나중에 보니까 내가 영향을 준 제자 중에 4분의 3은 나와 같이 시장주의자로 변했고 나머지 4분의 1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결별을 했어요.”
―한국의 보수주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에는 1960, 1970년대만 해도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보수주의는 없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동양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비합리적이고 유교적인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었죠. 유교라는 것 자체가 지배계층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던 도구니까. 보수주의는 그렇게 변질된 채 내려왔죠.”
안 이사장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탄생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일이다. 그 뒤로도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극히 최근에 와서야 보수주의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하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게 안 이사장의 주장이다.
“6·25전쟁 때문에 한국의 보수주의가 색깔론으로 뒤덮이게 됐습니다. 한국의 보수는 대부분 반공주의를 앞세우는 게 문제예요. 반공주의가 보수주의의 전부가 아닙니다. 북한과 내통하고 협력하는 종북(從北)주의를 제외한 다양한 사상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속에 모든 사상을 다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한국 사회는 선진화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길입니다.”
안 이사장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보수주의도 맹비난했다. 지배계급이 자신의 가문과 권위를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수주의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전통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주제가 발달한 서구와 달리 중앙집권제 아래 지주제가 발달한 한국은 가진 계층이 사회적 의무를 부담하는 전통이 짧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안 이사장은 진보주의자들에 대해선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점, 사회운동을 해도 대한민국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이사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토대로 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헌법 체제’에 대한 인정,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에 대한 인정이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 가운데 일부는 레닌주의, 또 다른 일부는 종북부의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닙니까. 민주당도 이념적으로 정립이 안 돼 있고요. 한국의 좌파는 외국에서 수입된 이론의 ‘중간 도매상’에 불과합니다. 자기 이론이 없어요. 한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정당이 어디 있습니까.”
보수 진영에 대해서는 반공주의를 버리고 진보 진영에 대해서는 종북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게 안 이사장의 각별한 권고다. 둘이 만나기 위한 대전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틀 밖에서 우리 체제를 공격하는 건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났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을 평가해 주시지요.
“이명박 정권이 여러 면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 것 같고. 외교도 기본은 하고 있어요. 한미동맹을 복원시킨 점도 그렇고…. 대북 문제도 MB식으로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핵개방3000’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포용정책이거든요. 핵을 포기하면 10년 안에 국민소득 3000달러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 그런데 북한은 선군정치 운운하면서 핵도 포기하지 않고 강성대국, 선군정치를 완성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핵과 미사일을 완성시키겠다는 거죠.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 체제를 정비하겠다는 것인데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정치는 어떻습니까.
“그게 문제예요. 대통령이 정치와 경영을 구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내가 여의도연구소 이사장할 때부터 얘기하던 겁니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정치를 하는데 회사를 경영하는 것처럼 효율성만 따지면 안 된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해관계가 조정이 안 되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잖아요. 사회 각 계층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아무리 잘해 봤자 사회적 갈등에 의해 효율을 다 까먹으면 손해 아닙니까. 양보를 얻으려면 반대쪽이 의견을 철회할 수 있는 퇴로도 열어 줘야 합니다.”
안 이사장은 MB 정권의 기업 경영식 국가 경영, 사회적 갈등이나 이해관계 조절 기능의 상실을 우려하고 있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사상적으로 정치·정파에 의해 갈라져 있어요. 내가 대선 전부터 박근혜씨를 포용하라고 했어요. 선거운동 때보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박근혜씨가 훨씬 더 필요하다고 했어요. ‘왜’냐고 묻더군요. 세계 어느 나라든 국민 지지율이 40% 이하로 떨어지면 정치가 안 되는 법이고, 박근혜씨의 협조가 없으면 국민 지지율 40%를 확보하기 힘들다고 했어요. 근데 그것을 못하네요.”
안 이사장은 “같은 당내 인사를 포용 못하는데 야당은 어떻게 포용할 수 있겠느냐”고 아쉬워했다. “갈등을 치유 못하니까 ‘촛불 시위’나 ‘광우병 파동’ 같은 게 생기는 거예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천안함 음모설’ 같은 것도 갈등을 치유 안 하니까 그렇게 되는 면이 있어요. 그 사람들 문제는 문제라 치더라도 대통령의 책임은 별도로 있는 겁니다.” 안 이사장은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인데 그게 안 되는 게 문제”라고 혀를 찼다.
―일단락되긴 했지만 세종시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대통령이 정운찬 총리 내세워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도 ‘아 이거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세종시 문제가 왜 생겼느냐 하면요, 결국 여야 간의 정치적 명분 싸움이고 지역 불균형 문제였는데 그 해결책을 내놓고 지역민들이나 야당과 타협을 했어야죠.”
―4대강 사업은.
“무조건 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시절부터 ‘한반도 대운하’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어요. 서구에서도 운하했던 나라들이 대부분 집어치웠죠. 영국이 그랬고 프랑스가 그랬어요. 지금 겨우 남아 있는 게 네덜란드하고 독일의 라인강 일대뿐이에요.”
―4대강은 대운하와 어떻게 다른가요.
“4대강은 운하 개념이 아니라 치산치수(治山治水) 개념입니다. 산이든지 강이든지 사람의 손이 들어가야 보존이 되지 자연대로 놔두면 황폐화되고 홍수가 납니다. 자연이라는 건 그냥 방치하면 황폐화하기 일쑤예요. 사람의 손이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보’를 만들면 물이 썩을 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도전을 극복해야 선진국이 됩니다.”
―4대강 추진 방식은 문제가 없습니까.
“홍보가 부족하죠. 국민 여론을 더 수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 가톨릭 신부님과 스님들을 적으로 돌리면 되겠습니까.”
―야당인 민주당에서도 4대강 추진과 관련한 입장 변화의 기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4대강은 이미 결론이 다 났어요. 지역사회와 지역민들이 요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간다고 봅니다. 앞으로 부작용을 어떻게 최소화시키는지가 문제죠.”
―얼마 전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한 인사가 MB 정부의 ‘친서민’ 정책을 포퓰리즘이라며 공격했는데.
“MB 정권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 해소를 위해 일하는 걸 포퓰리즘이라고 몰아세우면 안 됩니다. 불균형을 시정하는 문제라고 봐야지. 이 대통령이 ‘윤리적으로 대기업이 나쁘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게 포퓰리즘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거래가 되고 있느냐 하는 접근은 필요합니다. 만약 중소기업의 생산력이 낮아서 그런 거면 할 수 없지만 불공정거래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다만….”
안 이사장은 예나 지금이나 중소기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경제학자다. 그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실제로 불공정거래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시장기능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대로 된 연구기구를 만들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어떻게 협력관계를 가져갈 것인지 연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는 측면이 없다고 볼 수 없어요. 대기업만 두들겨 패도 안 되지만, 불공정거래를 시정시켜 중소기업의 생산력을 높이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 이사장은 1980년대 중반 중진자본주의론에 눈을 뜨고 이를 ‘캐치업(catch-up)이론’으로 승화시켰다. 개발도상국으로서 선진국의 기술과 제품을 빠르게 추격해 경제 발전을 기한다는 이 이론에 기초, 한국은 세계 13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사회주의론혁명론―중진자본주의론―캐치업이론의 길을 부단히 걸어왔던 안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선진화에 낙관적이다. 그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최종적인 발전 전략은 뭘까.
―대한민국 미래는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한국의 여러 측면에서 아직도 캐치업하는 성격이 강하죠. 경제적으로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다가가고 있지만 문화적·정신적·학술적인 부분은 여전히 뒤처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 역시 앞으로 20년 안에는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다고 봅니다. 지금의 저는 ‘한국의 선진화’라는 것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선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변수는.
“북(한)쪽이죠. 북쪽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요. 그게 제일 큰 문제인데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맘대로 안 되니까요. 국제적인 이해관계나 문제가 복잡하잖아요. 북이 소프트랜딩을 하면 다행인데 하드랜딩하면 정말 문제가 크죠. 만에 하나 북한 체제가 붕괴해 한반도가 국제적인 분쟁지가 된다면 당장 혼란이 오겠죠. 북한 문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그게 한국의 미래상을 결정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요.”
―캐치업이론을 대신할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 전략은 뭡니까.
“한마디로 국민통합이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통합할 수 있을까… 그걸 개발하자…. 이게 요즘 저의 가장 큰 학문적·지적 화두입니다.”
안 이사장은 국민통합론을 가다듬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 이게 간단히 한마디로 동의받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는지 국민들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자생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선진국에 의한 식민지화, 저개발화를 토대로 국제 교류를 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점도 당연히 알아야 하고….”
안 이사장은 최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다시 돌입했다. 남북 문제나 보혁 간의 대화 같은 것도 그의 학문적 과제에 속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할 거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야 내부의 뿌리 깊은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 통합을 통해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일어서려는 기자에게 안 이사장은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국민적·정파적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근데 내가 나이가 많거든…. 앞으로 조금 더 하긴 하겠지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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