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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0년 08월 16일(月)
대표 시인들 ‘내 생애 최고의 시적인 장면’
행복했던, 아팠던 그 순간은 영원의 詩로…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내 여자는 동해 푸른 물과 산다/ 탁류와 해초들이 간간이 모여/ 이룩하는 근해의 평화를 꿈꾸지 않는다/ 저녁마다 아름다운 생식기를 씻어 몸에 담고/ 한층 어렵게 밝아오는 먼 수평까지 헤엄쳐나가/ 아침이면 내 여자는 새 바다를 낳는다/ 살을 덜어 나의 아들을 낳는다”(이영광의 시 ‘동해’ 중에서)

이영광 시인은 1986년,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친구와 함께 동해로 갔다. “동해는 거칠고 캄캄하고 축축하고, 무엇보다 먼 바다”였다. 그 바닷가 삼숙이 매운탕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문득 시가 튀어나왔다. 시인에 따르면, “명태잡이 불빛 한 척 띄워놓고 갓 돋은 살 부비며 동해 전체가 운다”라거나 “아무것도 낳아주지 않는 어머니/ 그저 영원히 사랑일 뿐인 그대”라거나 “여자여, 거대한 손을 펼쳐 소금처럼 익사한 나를 건져놓아라” 따위의 구절들을 읊조렸다.

시인은 “‘동해’는 내 습작시절의 작품 목록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며 “‘동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시를 작파하고 취직해서 술상무가 되었거나, 의리나 따지는 양아치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인에게는 누구나 시와 삶이 일치하는 순간을 시로 응축한 특별한 체험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처럼 트라우마로 남은 체험도 있고, 첫사랑이나 유년의 한때처럼 되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간도 있다. 한 시인에게 벼락치듯 다가온 ‘결정적인 한순간’은 한 편의 시 속에 현상(現像)돼 새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발간된 계간 ‘시인세계’(문학세계) 가을호는 이 같은 시인들의 ‘내 인생 최고의 시적인 장면’을 특집으로 실어, 운명처럼 맞닥뜨린 삶의 한순간에 대한 시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규동 김종해 강은교 문정희 김승희 조정권 김광규 장석주 등 수록시인 18명의 시 속에 담겨진 ‘결정적 순간’의 기록들은 시가 삶의 내밀한 지층을 뚫고 나오는 비밀스러운 장면들을 보여준다.

192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인 김규동 시인에게 잊히지 않는 생의 한 장면은 어린 시절 고향이었던 두만강가의 추억이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에서 어린 시인은 썰매를 탔다. 그 시절 그곳에선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짓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시 ‘두만강’ 중에서).

두만강과 작별하여 멀리 떠나온 시인에게 두만강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시적 제재가 됐다. 이제 시인은 “두만강은 나에게 있어 청춘과 시를 엮는 뜨거운 원천이었고 사랑의 촛불이었다”고 돌아본다.

문정희 시인은 지난해 겨울, 한 시낭송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심사를 하다 그만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말았다. 참가자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낭송한 ‘베개’라는 시 때문이었다. “…서툰 어머니의 조선 글씨가/ 포로롱거렸다/ 베개…베개…베개…베개…/ 어머니는 땅에 묻히고/ 나비는 남았다. 남아서는/ 밤마다 내 머리맡,/ 피로 도려낸 벼랑 위에서/ 흰 칼춤 추었다/ 이승과 저승을 날아다녔다”(시 ‘베개’ 중에서)

그 시가 너무 아프고 낯익어서 처음에는 누구의 시인가 하고 기억을 되살려보기까지 했다는 시인은, 자신이 20여 년 전쯤에 쓰고 까맣게 잊고 있던 시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직후 어머니가 손수 마련해놓은 수의를 꺼내다 ‘저고리, 치마, 손싸개, 발싸개…’라고 수의의 갈피마다 어머니가 써놓은 메모 중 ‘베개’가 마루에 떨어져 시인의 눈을 ‘찔렀던’ 것이다. 시인은 “‘베개’는 마루에 떨어져 수천의 흰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고 털어놨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우리 시대 대표적 시인들이 보여주는 순간의 기억들은 ‘결정적 순간’의 발화이자 기억의 현상학을 섬세하게 구성한 자기고백의 시편”이라며 “그 순간성의 신비에 동참하면서 우리도 ‘특권을 부여받은 착란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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