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 강제병합 100년 - 과거 알아야 미래 보인다>조선은 멸망했나, 멸망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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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9일은 일본의 강제로 체결된 한국병합조약이 공포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에 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됐고 1주일 뒤인 29일에 순종황제의 칙유가 공포되면서 500여 년간 한반도를 통치해온 조선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8개조로 된 한국병합조약은 ‘제1조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 양여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17세기부터 1910년까지 진행된 조선의 쇠퇴와 망국의 과정을 살피거나 고종과 그의 시대를 새롭게 조명한 역사서 두 권이 출간됐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 지음 / 돌베개

동양사 전공자로 ‘밖에서 본 한국사’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했던 역사학자 김기협씨가 펴낸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와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영숙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이 펴낸 고종 평전인 ‘고종 44년의 비원’이 바로 그것. 두 권의 저자는 고종과 그의 시대, 특히 대한제국(1897~1910)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서로 상반된 평가를 내놓고 있어 관심을 끈다.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저자는 조선의 실패를 유교 정치의 좌절과 동아시아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김씨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조선 망국(亡國)의 원인을 두고 논의돼 온 ‘유교 망국론’과 ‘유교 자본주의론’과 별개로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유교, 또는 유교정치의 원리와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유력 계층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해 왔으며 건국 초기 조선사회의 안정도 이런 유교 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이어진 유교 정치의 쇠락과 지배층의 권력 사유화,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이 맞물리면서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점에서 김씨가 주목하는 것은 망국의 귀결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일제에 의해 조선이 망한 결과에만 주목했지 무너지는 과정 자체를 복기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일제에 지우기 때문에 망국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게 김씨의 지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광해군 이후 인조반정과 붕당정치,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왕권의 쇠퇴로 유교 정치의 틀이 작동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면서 권력의 사유화가 촉진됐으며 모든 권력이 황제 1인에게 집중된 대한제국의 건립으로 권력 사유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김씨에게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유교정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읽히며 조선이 개항 이후 유럽식 근대화 도입만 빨랐어도 망하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은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김씨에 따르면 조선의 망국은 쇄국과 개국 여부를 떠나 유교 국가 체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세도정치에서 이미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김씨는 특히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을 주로 인용하며 고종이 조선 왕조 위기의 순간에도 수시로 의정부 관리들을 갈아치우며 자신의 부와 권력쌓기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한다.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양위 압박에 몰리자 자신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박영효를 일본에 연줄이 많다는 이유로 궁내부 대신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고종의 이 같은 일련의 돌출 행동들이 한국을 ‘식민지화’하자는 일본 내 강경파에 힘을 실어준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김씨는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겠지만 조선의 ‘품위 없는 죽음’에는 분명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아울러 20세기 들어와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진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하며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 정상적인 도덕 수준의 틀을 갖추지 못한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라고 일갈한다.

고종 44년의 비원 / 장영숙 지음 / 너머북스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라는 부제가 붙은 장 연구원의 책은 ‘개명(開明)군주’ 또는 ‘무능하고 실패한 개혁군주’라는 양극단의 평가에서 벗어나 전문 연구자답게 고종의 집권 전 시기에 걸친 정책과 그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다면적인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한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양위될 때까지 44년간 왕위를 지켜 조선왕조 역사상 영조와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장기간 왕의 자리에 있었던 군주다.

장 연구원에 따르면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곧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왕권강화에 집착했으며 의욕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대한제국의 건립과 함께 추진된 광무개혁은 정치체제 면에서 서양의 입헌군주제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을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손색이 없다는 게 장 연구원의 주장이다.

하지만 고종은 대원군과의 갈등, 청과 일본의 위협, 국내 정치세력의 반정권적 음모 때문에 성향이 다른 정치세력과 처족인 민씨 세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군주권을 수호하고 자신의 집권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 자신보다 청나라나 일제에 친밀감을 보인 관료군이 형성돼 고종의 발목을 잡았으며 지배층의 적전(敵前) 분열은 결국 고종의 비극을 넘어 대한제국의 비극이 됐다.

특히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킨 것은 황제만 억압하면 국권이 손쉽게 넘어가는 역설을 성립시키고 말았다. 고종은 상당 부분 개명적인 요소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 전통 유지와 개혁 촉구, 폐쇄와 개방 등을 불균형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과도기의 혼란한 군주’로 남게 됐다고 장 연구원은 고종의 한계를 지적한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