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오현경씨는 옛 동양극장 터에 자리한 문화일보홀의 무대에 앉아 “고교 때 교모를 쓴 채 동양극장에 와서 본 연극들이 나를 평생 무대에 서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원로 연극배우 오현경
연극배우 오현경(74)씨를 만났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이 괜찮으시던가요”라고 묻는다. 노년에 두 차례나 암 수술을 받은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그런 우려엔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 시절처럼 혼자 훌쩍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쾌활하게 산다.
“지난 일요일 오후 늦게 륙색을 등에 짊어지고 집을 나섰어요. 제 조상들의 고향(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다녀왔지요. 서울 태생인 제가 1·4후퇴 때 잠깐 내려가 머물렀던 곳이에요. 당시에 다녔던 중학교에도 가보고, 시골 버스를 타고 다니며 모처럼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왔어요. 대구에서 하룻밤 자고 올라왔더니, 아내가 ‘여벌 옷도 가지고 가더니 왜 이렇게 금세 오느냐’며 웃더군요, 하하.”
2일 오후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오씨의 목소리는 젊은이처럼 활달했다. 그의 머리를 가득 뒤덮고 있는 백발을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젊은 음성이었다.
지난 10월26일 문화일보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백발을 통해 칠순의 나이를 드러냈으나, 목소리는 연극 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힘찼다. 4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말을 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본사 자리가 옛 동양극장 터라는 것에 큰 애착을 보였다. “요 근처에 있었던 서울고에 다닐 때 교모 쓰고 동양극장에 와서 연극을 많이 봤어요. 부민관, 동도극장에도 가끔 갔지요. 그때 봤던 연극들의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그것 때문에 제가 배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교에 다닐 때 연극부 활동을 했는데도 연세대 국문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공부를 잘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공부를 못했어요. 당시 우리 고교에서는 명문대학을 쉽게 갔어요. 연대 국문과를 지망한 것은 연극을 하는 데 문학이 도움이 될까 해서였지요. 연대에 간 또 하나의 이유는 영문학과의 오화섭 교수님이 대학연극반인 ‘연희극회’를 이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습니다. 오 교수님 밑에서 연극을 하며, 대학 재학 중에 8편의 작품에 출연하고, 2편을 연출했어요.”
―대학 시절에 친하게 지낸 분 중에 연극을 하는 분이 있습니까.
“배우는 없고 작가들은 많이 있어요. 나중에 방송작가로 크게 활동했던 영문학과의 오혜령이 후배였는데, 잘 따랐어요. 혜령이는 오화섭 교수님의 딸이었는데, 오빠 세철씨와 함께 입학하며 남매가 수석, 차석을 했어요. 두 사람의 졸업성적도 똑같이 수석, 차석이어서 화제가 됐었지요.”
―영문학과의 오혜령씨와 국문학과의 박상규(가수 겸 사회자)씨가 동창생으로 친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4학년 때 상규가 1학년이었어요. 저를 쫄쫄 따라다녔지요.(웃음) 제가 그 당시 웃기는 소리들을 많이 했는데, 상규가 나중에 방송에서 사회를 보며 써 먹더군요.”
―졸업 후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한 뒤 50여년간 연극 무대를 지켜오셨습니다. 암 투병을 하시면서까지 무대에 섰는데, 도대체 연극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예술도 했지만,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그쪽보다 언제나 마음이 연극 쪽에 있었어요. 어두컴컴한 객석의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며 감정 교류를 한다는 게 배우의 보람이고, 어떤 무대, 어떤 악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배우의 자존심이에요. 소수라도 진정한 감동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요.”
―지난해 말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 역할을 하신 걸 봤는데, 저 연세에 셰익스피어 극의 대사를 어떻게 암기하나 궁금하더군요.
“대사를 일부러 외려고 하지 않고 작품 분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지요. 사실은 그 공연 첫날에 대사를 놓치는 실수를 했어요. 연출자가 좀 더 천천히 해도 좋다고 하기에 거기 맞추려고 하다 보니 제 호흡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배우는 연습한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제가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인데….”
그가 자신의 작은 실수를 되돌아보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가 왜 한국 연극의 자존심으로 불리는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평론가 구히서씨는 오씨의 연극인생 50년을 평하는 글에서 “그는 적역에 명연기를 끌어냈고, 반드시 적역이었다고 할 수 없는 배역에서 좋은 연기를 찾아냈다”고 상찬했다. (오씨는 내년 4월 다시 연극 무대에 선다. 지난해 4월 상연했던 ‘봄날’의 관객 반응이 좋아서 앙코르 공연을 하는 까닭이다. 그는 ‘봄날’에서 고집쟁이 아버지 역을 맡아서 삶의 연륜과 연기 내공에서 우러나온 배우의 향취를 보여줬다는 평을 들었다.)
―‘TV 손자병법’(1987~93년 KBS 2TV 방송)의 만년 과장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전에도 드라마에 많이 출연하셨다던데.
“요즘 제가 TV에 나오지 않으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요즘 왜 활동을 안 하느냐고 해요.(웃음) 사실 저는 1950년대 말 서울에 처음으로 생긴 텔레비전방송(HLKZ)에 드라마 연기자로 참여했어요. 그때는 탤런트라는 말도 없을 때였어요. 함께 했던 연기자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이제 이순재씨 정도만 남았지요. 김영옥씨가 고교 교복 입고 출연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는 이후 극작가 유호씨가 TBC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유호 극장’의 2부에 출연, 졸부 집안의 바보 장남 역할을 기가 막히게 해냄으로써 말 그대로 장안의 화제를 일으켰다. 이후 그는 이 연속극이 끝나는 13부까지 나왔고, 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유호씨와의 인연은 뒤에도 이어져 1970년대 후반 신인 배우 유지인이 스타로 부상하는 TBC 드라마 ‘서울야곡’을 함께 하기도 했다.
―방송 활동을 타의로 쉰 적이 있다면서요.
“TBC에서 연기자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주모자로 오해 받아서 억울하게 쫓겨난 적이 있어요.(그는 이 대목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남의 험담이 될 수 있으니 기록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후 연극 활동에 힘을 쏟으면서도 TV탤런트협회를 만드는 데 산모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여러 사정으로 또 한동안 TV를 쉬었는데, 실험극장 후배가 찾아왔어요. 자신이 방송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갔는데 크게 히트할 만한 것을 만들어 인정받고 싶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아이디어를 낸 게 ‘TV 손자병법’이에요. 장용, 서인석, 정종준, 고 김성찬 등 후배들과의 호흡이 참 좋았어요.”
―후배 중에 이름이 같은 여배우가 있죠? 요즘 연기 활동이 활발하더군요.
“아, 그 아이가 다시 좋은 활동을 하고 있군요. 그 아이가 청소년 드라마에 나오던 여고생 때 사진기자가 주선해서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적이 있어요. 미스코리아로 뽑히고 연기자가 된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인사를 했어요. 자기 이름을 바꿀 것을 상의해오기에 그대로 쓰라고 했어요. 이후에 그런 스캔들이 나서 참 안타까웠지요. 천성이 착한 아이인데, 못된 놈을 만나서…. 그 일이 있었을 때, 사람들이 동명이인인 저에게 전화를 무척 많이 했어요. 중년 남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오현경씨 만나고 싶다’며 수위들과 싸우는 해프닝도 있었고 …. 시련을 겪은 그 아이가 재기에 성공했다니 너무 기쁩니다. 연기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이인데, 그 일을 이겨낸 후 더 성숙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거액의 상업광고(CF) 촬영 요청을 수차례 받았는데,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예술을 한다고 나왔는데, 잘못하면 타락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다가 안 하기로 결심했지요. ‘TV 손자병법’ 후에도 그런 제안이 있었는데, CF는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후회는 없었는데, ‘송백당(松栢堂)’ 문 닫을 때는 참 돈이 아쉽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는 2001년 연극계 후배들에게 극화술 지도를 하는 배우 재교육연구소인 ‘송백당’을 사비로 만들어 운영했으나, 재정적 문제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알고 발성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최근에도 명동예술극장의 ‘명동배우교실’에서 극화술과 발성을 가르쳤다는 것이 극장 관계자의 전언이다. 오씨는 이번 인터뷰에서도 “영어 발음은 신경 쓰면서 우리말엔 신경 쓰지 않는 현 교육 체제에 문제가 있다”며 “끝을 묘하게 올리는 일본식 억양이 신세대에게 퍼져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발병과 교통사고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는데.
(그는 1994년 식도암 수술을 받았고, 이후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맸다. 2007년엔 위암으로 위의 절반을 잘라냈으며, 그러고도 병마가 끊이지 않아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암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죽음 직전에 간 적이 있어요. 식도에서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했는데, 지혈을 안 시켜 피가 몸에서 다 빠져 버린 거예요. 눈을 뒤집고 혓바닥을 낸 채(그는 연극 무대에서처럼 연기를 했다) 죽은 듯이 있는 것을 아내가 발견했어요. 식도암 수술 후엔 약물 중독 때문에 딸꾹질(그는 또 생생하게 재연했다)을 5일 동안 했는데, 의사들이 고치질 못하더군요. 거의 죽게 생겼을 때에야 ‘폐인 클리닉’에 가서 철사줄에 젤리를 묻혀서 횡격막을 건드리니 딱 그쳤어요. 도대체 병원이라는 데가 왜 지혈, 약물 중독 문제를 못 막는지 참 기가 막혔어요.”
―생사의 기로를 수차례 경험하신 어른으로서 후학들에게 삶의 자세를 한 말씀 하신다면.
“인생은 각자 사는 것이에요. 내가 주제넘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다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추한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신문사에 다니며 평생 선비정신으로 살았던 제 형님이 일생의 사표가 됐습니다. 형님처럼 그렇게 명예를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내년 4월 공연하는 ‘봄날’에서의 연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지난 8월에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에서 면암 최익현 역을 할 때 내가 대사하는 것을 보고 관객들이 놀라더군요. ‘봄날’도 잘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투병 중이니) 언제 기운이 빠질지 모르니까요. 항상 마지막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배우로서의 혼을 다합니다.”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차장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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