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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11년 01월 03일(月)
오랜 견딤… 깊은 내공… 진한 울림
등단 35년만에 첫 시집 ‘오래…’ 낸 권지숙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해는 지는데 나뭇가지에서 떨고 있다/ 가야 할 길과 지나온 길을 지우며 등 구부려/ 가야지 가야지/ 찢긴 플래카드처럼 낙심에 떨며/ 차가운 낮달 사이로 흩뿌리는 겨울비/ 머리 기댈 마른 잎 하나 없는 굴욕의 빈 가지 위에서/ 저 무한천공 갈 길은 아직 먼데/ 감기는 눈 치켜뜨며/ 정신 차려 정신 차려야지/ 온몸 쪼아대는”(시 ‘새’ 전문)

지난 1975년 시 ‘내 불행한 아우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던 권지숙(61·사진) 시인이 등단 35년 만에 첫 시집 ‘오래 들여다본다’(창비)를 상재했다. 시집엔 시인이 35년 동안 걸어온 시적 행로가 고스란히 드러나 눈길을 끈다.

정호승·김명인·김창완 시인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활동을 했던 권 시인은 1980년대 이후 돌연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문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후 간혹 지면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은둔과도 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권 시인은 차츰 문단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권 시인은 그동안 오롯이 시인으로 살아왔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앞서 인용한 수록시 ‘새’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적 인생 행로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멀다는 사실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시집엔 등단작에서부터 최근의 시에 이르기까지 권 시인의 삶을 관통한 시 세계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발표한 ‘야행기’ 연작시에선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야행기 5’에서 시인은 “이제 모든 병든 자들의 노래는 시작된다// 모호한 몸짓으로 모두들 헤어져버린 거리에서/ 푸른 밤은 열리고/ 석고처럼 굳은 얼굴들/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라가 된 도시/ 능히 재로써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소란스런 이 시간 어리석은 짐승들 울부짖는다/ 저 어두운 묘혈 속에 숨어 있던 자들/ 서서히 모반의 층계를 오른다”고 적시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작인 ‘아버지는 웃고 계시고’에서 시인은 어느새 ‘아들 같은 아버지’에 대해 읊고 있다. 그만큼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관조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아버질 만났어요 서른아홉 헌헌장부이신 아버지 제가/ 아버지 나이만 돼도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게 그러게/ 웃고 계신 아버지 불국사 다보탑 앞에서 멋쟁이 지팡이/ 짚고 검정 모직코트 입고 사진 찍으셨죠 아들 같은 아버지/ 흔들리는 풍경 너머로 대웅전 지붕 위에 팔베개하고 누워/ 개구쟁이처럼 웃고 어서 내려오라고 어서 가자고 손짓하시는/ 여든여섯 어머니 털배자 입고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은/ 어머니의 푸른 머리카락이 눈부시네요”(시 ‘아버지는 웃고 계시고’ 전문)

물론 그동안 시인이 견뎌낸 삶의 신산 또한 만만찮았을 게다. 수록시 ‘길 위에서’는 시인이 스스로 문단에서 멀어져간 후 견뎌내야 했던 고통과 생의 남루함을 슬쩍 내비치고 있다. “우는 아이를 업고/ 낯선 길을 한없이 헤매었다// 길 위에 던져진 무수한 신발들 중에/ 내 신발 찾다 찾다 잠이 들었다// 붉은 황톳물 넘치는 강을 내려다보며/ 해가 지도록 울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시 ‘길 위에서’ 전문)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씨는 “시인으로 등단하고 나서 35년 만에 처음으로 시집을 내는 것은 우리 문단에서도 희귀한 사례에 속할 것”이라며 “그러나 이번에 시집 원고를 통독하고서 나는 그가 시를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를 멀리하지도 않았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고 밝혔다.

정호승 시인은 ‘추천사’에서 “한 시인의 신산한 일생이, 또 그 시인이 살아온 시대의 어두운 눈물이 이 한 권의 시집 속에 이슬처럼 영롱하게 맺혀 찬란하다”며 “권 시인에게 시는 이제 사랑과 무위의 세계”라고 썼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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