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크리스토퍼 힐 “北 10년내 존립 못할 수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미대사관저에서 최근의 한반도 정세와 외교관 퇴임 이후의 변화된 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평상복 차림의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가 17일 서울 중구 정동 미대사관저를 나서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2005년 주한 미대사에서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가 된 후 워싱턴과 서울,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대북협상을 진척시킨 덕에 국제적 명사가 된 인물이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 미대사관저에서 만났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이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인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노(No)’라며 웃음을 보였지만 정작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중서부 덴버대 조지프 코벨 국제관계대학원 학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국제관계전문대학원연합(APSIA)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미 고위관리라는 ‘무거운 부담’을 벗어버린 탓인지 몸가짐은 경쾌했고 그의 발언에선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북핵에서 한·미관계, 한·중관계로 이어지는 해박한 정세 분석은 동아태 차관보 시절의 그를 연상케 했지만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입장도 더 명확해졌다. 차관보 시절 그의 발언은 더러 의도적으로 애매했고 수사가 많았지만 이젠 단정적이고 직설적이었다. 중국과 북한에 대한 비판은 너무 신랄해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 1 외교관에서 대학 학장으로

그를 만나던 날 아침 온도는 영하 13도였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가 이미 출근해 텅 비어 있는 대사관저 응접실로 그가 들어섰을 때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땀에 젖어 헝클어져 있었다. 라운드 티셔츠에 점퍼 차림이었다. 아침 운동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먼저 대학으로 옮기게 된 배경을 물었다.

“국무부에서 지난 33년간 좋은 사람들과 어려운 일을 해왔는데, 이제 그 과제를 다음 세대로 넘기고 콜로라도 덴버에 정착했습니다. 덴버대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박사학위를 받은 곳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아버지가 봉직했던 대학입니다. 모든 게임이 이뤄지는 워싱턴을 떠나 덴버로 간 것은 내 일생일대의 대변화인데, 그 빅 체인지를 요즘 내가 즐기고 있습니다.”

공직 은퇴 후 두 번째 한국 방문인데, 연평도 포격 도발 후 한국인들의 대북 인식에 상당한 변화가 있는 듯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대북 인내심이 점점 소진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은 특히 북한이 지난해 천안함을 공격하고 연평도를 포격 도발한 이후 대북문제에 대해 점점 더 단합된 인식을 갖게 되는 듯합니다.”



# 2 “중국, 한반도 현상유지 정책 바꿔야”

그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후 대북 강경론이 힘을 얻고 있는 한국의 분위기에 대해 공감을 표한 뒤 “한·미 양국은 제가 국무부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북 대응에 있어 아주 단합돼 있고 한 방향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한국 편에 서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과 중국이 무조건적으로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중국은 6자회담 조기개최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이 말하는 6자회담 조기개최론은 하나의 슬로건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우리는 중국이 한반도에서 추구하는 현상유지 정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의 카운터 파트였던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이 미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해 “사과 없이 대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자 “더이상 미국의 협상대표는 아니지만…”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천 수석이 말한 것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남북대화가 재개되려면 북한이 뭘 더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북한의 사과 여부를 둘러싸고 관측이 엇갈리는데 북한이 천안함과 연평도 문제를 털어내고 대화로 전환하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북한은 현 국면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이 최근 보여온 행태로는 그들이 얻으려는 것을 절대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처럼 미국도 북한이 사과할 때까지 기다릴 것으로 보십니까.

“나는 더이상 미국 행정부에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은 언제든 한국 편에 서서 한국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지난 14일 아산정책연구원 특강 때 북핵문제의 조기해결이 어렵다고 했는데.

“북한의 최근 행태를 볼 때 나는 북한이 체제 생존을 위해 핵을 보유하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핵이 생존에 핵심적 요소로 인식된 만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장기적으로 핵폐기 및 평화체제 등이 포함되는 좀더 포괄적인 협력 틀을 만들어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늘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의 중국 비판은 신랄했다. 그의 주장이 2005년부터 3년 넘게 6자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에 대해 느낀 좌절감과 스트레스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발언 수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 3 북, “UEP로 국제 거짓말쟁이 전락”

―북한이 지난해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했는데, 그 심각성을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미국은 지난 1999년부터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기기와 시설을 구매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런 움직임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2008년 6월 핵신고서를 제출했을 때 우리는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해 말부터 협상은 교착 상태가 됐습니다. 북한은 그런 상황에서 우라늄 농축작업을 본격화한 것으로 봅니다. 북한은 우리와의 협상이 중단되고 12~18개월 뒤 우라늄 농축시설을 시그프리트 헤커 박사에게 공개한 것입니다. 북한의 핵신고에는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로써 북한은 국제적인 거짓말쟁이가 됐습니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항상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중국을 설득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기했는데, 한국의 대중 설득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한국이 중국을 설득하는 게 어렵다는 점에 대해 공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중국이 대북문제 해결에 있어 좀더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중국은 늘 북한에 대한 레버리지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겠습니다. 중국은 레버리지가 없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구사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

그의 중국 비판은 계속됐다. 북핵문제의 해결 단초는 북한 자체에 있다기보다 중국에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인 것 같았다. 힐 학장은 그가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한 이유를 재차 강조하는 이유가 “북한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북한에서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10년 내 북한은 북한인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고 앞으로 10년 내 북한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함께 협의를 지속해 나가야 합니다. 중국의 이해에 반해 우리가 전략적 이익을 얻으려는 게 아니고, 중국과 더불어 미래의 상황을 준비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북한의 급변사태가 10년 내 도래할 가능성이 높으니, 한·미·중 3국은 재난대비 차원에서 상호의 이해를 높여놔야 북한 문제의 소프트랜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4 “한반도 문제, 한국 주도로 풀어야”

힐 학장은 지한파 인사답게 “한반도 문제는 중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한국이 결정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의 주장은 미·중 전략가들에겐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적 발언일 수도 있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외교안보통 원로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미국과 중국, 즉 G2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그의 글은 미·중 합의로 남북한의 미래를 처리해야 한다는 제언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브레진스키의 칼럼에 대한 불편한 소견을 전했더니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브레진스키는 늘 G2적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폴란드계 미국인입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미국과 러시아가 폴란드의 운명을 결정하려 했던 어떤 시도도 폴란드가 수용하지 않았던 역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100% 장담하는데 한반도 문제가 미·중 양국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도 물론 한반도 문제를 협의합니다. 때로는 한·미, 때로는 한·중, 때로는 한·미·중 3자가 협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한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 미국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대화 중 민감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나는 현직을 떠났지만” “나는 더이상 협상에 관여하지 않지만”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그는 이 대목에서 마치 다시 미 정부 당국자가 된 것처럼 소신있게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현직 인사들은 물론이고, 한반도 문제에 관여한 전직 인사들도 브레진스키식 한반도 구상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주이라크 미국대사를 끝으로 외교관직에서 은퇴했다. 2009년 3월 그의 이라크 대사 내정 사실이 알려졌을 때 외교통상부 안팎에서는 ‘좌천이냐 영전이냐’를 둘러싸고 말이 많았다. 북핵협상가에서 하루아침에 이라크전후처리협상가로 가기까지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 5 이라크 북핵보다 쉬웠다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요청을 받았습니다. 2009년 1월 새 행정부 출범 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션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하기에 면담때 미래의 북한 정책에 대한 메모를 해가지고 갔습니다. 클린턴 장관은 ‘이라크에 가겠느냐’는 말을 꺼내더군요. 그래서 ‘왜 저냐’고 묻고 싶었지만 얼른 감정을 수습하고 ‘그런 제의를 해줘서 고맙다. 이라크 문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달라’는 말을 하고 제 사무실로 왔습니다. 그리고 동아태국의 스태프들에게 클린턴 장관의 제안을 설명했더니 ‘크리스가 가면 나도 가겠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한 명 두 명씩 나서더군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21세기 첫 10년 미국에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수많은 미국인들이 이라크전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데 내가 그 자리를 회피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힘이 부치기 때문인가, 아니면 겁이 나기 때문인가 수없이 자문해 봤습니다. 그러다 ‘내가 후에 아이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든든한 동료들 덕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9년 4월 부임한 뒤 16개월간 이라크 대사로 활동했는데, 나시리야 현지 방문때엔 폭탄테러로 생명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라크 대사로 잘 갔고, 의미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라크 대사 퇴임에 앞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때 “이라크는 내게 가장 무시무시한 도전(formidable challenge)”이라고 했지만 그 후에 다른 인터뷰에서는 “이라크 문제는 북핵협상보다 쉬웠다”고 말했다. 두 얘기를 연결하면 북한 문제가 가장 어려웠던 이라크 문제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문제라는 소리인데 정말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파안대소했다.

“물론 두 문제 모두 어려운 이슈죠. 이라크 문제는 아주 복잡합니다.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한 나라인 데다가 이라크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보는지도 참 알기 힘들었습니다. 북핵협상은 협상을 진전시키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지 해답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상황은 아무리 협상을 해도 뭐가 해답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어요. 때때로 ‘아, 베이징으로 가서 6자회담을 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는 “이라크 대사에서 물러나면서 적어도 하나만큼은 당당했다”고 했다. 미국이 이라크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게 반미세력의 주장인데 막상 전쟁 후 원유 채굴을 위해 이라크에 진출한 기업은 중국과 영국, 프랑스 회사들이고 미국 회사는 한 곳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석유 때문에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 정부의 민주적 통치가 가능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미국은 그간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6 한국인에게 친근한 주한대사 이미지

그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4개국 대사를 했지만 한국에서 대사로 지낼 때가 좋았다고 했다. 외교관으로서 전성기를 열어준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것이다. 반미감정이 드셌던 노무현정부 때 주한 미국대사로 오면서 마음고생이 컸지만 처음으로 광주 5·18묘역을 참배하는 등 전향적인 활동을 통해 이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주한 미대사로서 파격 행보를 한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했다.

“뭐랄까, 과거 주한 미국대사들이 남겨 놓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정부 관리와 대기업 인사들만 상대하는 식의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 사람들에게 친근한 미국대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기름을 잔뜩 바른 회색빛 머리에 양복 입고 젠체하는 그런 대사는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주한 미대사 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의 가슴속엔 한·미수교 후 100여년간 한국에 온 어느 미국대사보다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 약속시간에 늦었다며 바쁘게 일어서는 그에게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봐도 되는가”라고 묻자 “이제 겨우 58세인데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는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면서 “앞으로도 역동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주한 미대사였고, 6자회담 수석대표였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 부장대우 muse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