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사회복지와 시장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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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경제학

한 시나리오 작가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는 내용이 담긴 쪽지를 남기고 숨진 사실이 열흘 만에 알려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수상 경력까지 있는 젊은 예술가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한국 사회에서 공정사회 논의가 새삼 활발하다.

경제적 정의는 결국 분배적 정의다. 사람에 따라서 생각하는 분배적 정의가 서로 다르지만, 누구나 일한 만큼 공정하게 받아야 하고, 또 그 소득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공감한다. 그런데 사실은 일한 만큼 공정하게 받았는데도 그 소득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수시로 벌어진다.

이 시나리오 작가만이 아니라 땀 흘리고 고생하면서 일했는데도 가난을 떨치지 못하는 ‘워킹 푸어’는 적지 않다. 시장경제에서는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일한 만큼 ‘공정’하게 받았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당사자들의 좌절감은 그야말로 절망의 수준이겠지만 시장경제의 작동원리가 그렇다.

필요한 것을 스스로 일해 조달하는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더 많이 일하면 반드시 더 많이 거둔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생업은 남들에게 팔 물건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시장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하면 사주고 외면하는 상품을 생산하면 사주지 않는다. 생업 선택의 자유 속에서 사람들은 잘 팔릴 상품을 찾아서 생산하므로 자원은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의 생산에 쓰이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만든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힘들여 일했더라도 그 성과를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면 시장경제가 주는 ‘공정’한 소득은 저소득이다. 그런데 땀 흘린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저소득을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땀 흘린 만큼 반드시 보상받는 정의사회’는 달리 말하면 누구든 땀 흘려 생산한 상품이라면 사람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사주어야 하는 사회다. 필요 없는 상품을 생산하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사준다면 그 상품의 생산 활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시장의 징벌 기능은 사라지고 자원은 불필요한 용도에 지속적으로 낭비되고 만다. ‘땀 흘린 만큼 반드시 보상 받는 정의’가 한동안 유지되겠지만 결국 모두가 궁핍한 사회로 몰락할 것이다.

시장 작동의 근본원리는 포상과 징벌이다. 사람들이 사주는 상품을 생산하면 돈을 벌고 안 팔리는 상품 생산에 매달리면 쪽박을 찬다. 무슨 생업을 선택하든 거듭 징벌 대상으로 전락하는 이들은 각자 일한 만큼 ‘공정’한 몫을 받더라도 그 소득으론 생계도 꾸리지 못한다.

사회가 공정성만 내세워 이들의 가난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몰아가면 비정하다. 시나리오 작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불공정성이 아니라 비정함이다. 시장의 비정함을 보완하는 사회복지는 결코 불공정성을 시정하는 조치가 아니다. 서슬 푸른 공정성을 따뜻하게 보완하는 인간적 배려다.

시장의 징벌은 ‘불필요한 상품을 사주지 않는 것’뿐이다. 이 시장의 징벌이 낳은 결과의 비정함을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필요한 상품을 생산’해 돈을 번 사람이 ‘불필요한 상품을 생산’한 사람의 정당한 몫을 가로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희소한 자원을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용도에 낭비하는 생산 활동을 징벌하지 않는 ‘공정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다. 복지 수혜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생활을 꾸리면서 시장이 원하는 생업을 찾아 재기하도록 도와주는 사회복지는 시장경제의 냉엄한 공정성을 보완하는 사회적 배려일 뿐이다. 결코 불공정성을 시정하는 장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