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파라다이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황주리 서양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라다이스’에는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지구의 50억 인구가 목숨을 잃고 20억이 살아남을 거라는 상상이 쓰여 있다. 일본이 겪고 있는 대지진과 쓰나미 참사를 보니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게 자연재해가 아닌가 싶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쓰나미의 위력은 집과 건물과 도시를 온통 집어삼키는 무서운 괴물 같았다. 지구 어디선가 그 무서운 자연의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아무리 현대 문명의 과학이 발달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겸허함을 배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느새 자신들의 존재의 덧없음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베르베르는 크게 보면 세계 전쟁도 동족상잔의 전쟁이라 쓰고 있다. 하물며 남북한 간의 싸움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싸움의 불씨인 종교와 광신적 국가주의가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올까? 지구상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이 종식된다 해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자연재해의 무서움은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준다. 언제 우리의 오늘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외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낯선 객지에서 엄청난 자연재해를 만나기도 한다. 발리에서, 태국에서, 뉴질랜드에서, 일본에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의 재앙 앞에 안전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지인 한 분이 몇 십년 동안 일만 했다며 정말 오랜만에 부부동반 해외나들이를 갔다가 그곳에서 지진을 만나 배우자를 잃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들은 오래도록 지니고 있던 땅이 수용돼 몇 십억원이 넘는 큰돈을 벌었다. 내게 소유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어쨌든 참 놀라운 건 그 끔찍한 자연 재앙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자세다.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조용히 끝없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혼란을 틈타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는 사람도 없는, 어쩌면 그곳이 천국을 닮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참사가 일어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그렇게 조용히 줄을 서는 일을 우리 세대는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다르다. 텅텅 비어 있는 영화관에서 아무 데나 앉아 있는 내게 “여기가 제 자리인데요” 하며 표를 보여주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그 융통성 없음에 짜증이 나면서도 동시에 예전과 달라진, 깍듯한 질서의식을 엿보기도 한다. 어쨌든 아무리 과거에 원수 나라라고 해도, 옆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에 박수를 치거나 고소하다고 빈정대는 식의 대처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남이 잘되는 건 좋은 일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건 아주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다. 남이 잘돼야 내게도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걸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남이 잘돼야 돈도 꾸러 오지 않고 내게 돈도 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앞으로의 시대는 ‘타산적 이타주의’가 지배할 거라는 석학들의 말을 텔레비전에서 흘려들으며, 드디어 인간의 진화가 마음의 차원에서도 이뤄지는 시대가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정신대에 끌려갔던 할머니가 위기에 처한 일본을 위해 위로금을 보내는 마음이야말로 진화된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그에 비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도 잊으신 건지,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 일본에 재앙이 온 거라는 말을 태연하게 하시는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마음 상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베르베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인류 전체의 폐경기라고 쓰고 있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결혼과 가족의 무게는 희박해지고, 믿고 기대며 살아야 할 식량도, 마음도, 정신도 고갈이 나고 있는 형편이다. 과연 우리가 후세에 물려줄 파라다이스는 남아 있을까? 우리가 살아 있는 오늘 이 시간과 공간이 바로 파라다이스라는 생각이 스쳐가는 봄, 꽃샘추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