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시인이 보내는 인생의 ‘기척소리’

  • 문화일보
  • 입력 2011-03-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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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를 맞은 김광규(70) 시인이 자신의 열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문학과지성)를 펴냈다. 시인은 “대략 2007년 여름부터 4년 가까이 발표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라며 “십진법의 기수에 1을 더한 숫자 10은 두 자리 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번 시집 발간을 새롭게 떠나는 계기로 삼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지난 1975년 등단한 이래 생활 속에서 느낀 체험을 바탕으로 ‘일상 시’의 영역을 꾸준히 개척해 온 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자신의 시풍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쉬운 듯 다가오면서도 비의(秘意) 한 자락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숨겨진 뜻’은, 앞서 인용한 시 ‘나무의 기척’에서 엿볼 수 있듯이 ‘툭’하고 다가온다. 요란스레 포장하거나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고, 은근히 다가와 알아차릴 듯 말 듯 ‘기척’을 느끼게 할 뿐이다. 또 다른 수록시 ‘능소화’에서도 시인의 이 같은 작법은 여실히 드러난다.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시 ‘능소화’ 전문)

한여름 오후 나른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시인의 머리 위로 살포시 고개 내민 능소화의 자태가 손에 잡힐 듯하다. 눈길 마주친 능소화에서 시인은 아기의 무구한 눈길을 느낀다. 그야말로 마음과 마음이 통한 순간이다. 이처럼 시인은 스스로 자연과 하나되어 눈을 맞추는 자세를 취한다.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는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비롯, 이제껏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반성, 지난 세월에 대한 회고, 여행지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별세한 지인(知人)들에게 보내는 추모의 내용 등을 담았다.

수록시 ‘교대역에서’는 부산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은 스스로 반성하며 이를 안타까워한다.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로/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시 ‘교대역에서’ 전문)

그런가 하면 고희에 이른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인생의 황혼에서 진한 페이소스를 드러내기도 한다. 수록시 ‘저녁나절’은 시인의 이 같은 심사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시 중 한 편이다.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시 ‘저녁나절’ 전문)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태환씨는 “김광규의 시는 약한 존재들에게 바쳐진다”며 “약한 존재란 무(無)에 근접한 존재, 무의 미덕을 갖춘 존재, 자기가 없는 듯이 물러남으로써 타자가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약한 존재는 사실 전혀 약한 것이 아니다”며 “강한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온통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 세계가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약한 존재들 덕택”이라고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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