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몸짓에 담은 ‘日 제로세대’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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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分節)된 춤과 음악, 계속 되풀이되는 대사,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 극단적인 단절…. 일본의 촉망받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카다 도시키(岡田利規)의 작품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지난 24~26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은 3회 모두 만석을 이뤘다. 심지어 26일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열린 전문가초청 토론회와 객석과의 대화 시간에도 관객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연극과 음악, 무용의 절묘한 조합으로 유럽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올랐다.

연극의 주제는 일본판 ‘88만원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제로 세대’에 관한 것이다. 이들이 현실에서 맞부닥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연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핫페퍼(Hot Pepper)’와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다.

막이 오르면 비정규직 직원 세 명이 등장한다. 배경은 회사의 사무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세 명의 비정규직 직원은 동료 계약직 직원인 ‘에리카’의 송별회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 의논한다. 이들은 피아노의 불협화음에 맞춰 각자 팔다리를 휘저으며 자신의 말만 되풀이한다. 남성인 ‘직원 1’은 쿠폰 잡지인 ‘핫페퍼’를 가지고 왔다며 이를 보고 식당을 고르자고 말한다. 여성 동료인 ‘직원 2’는 에리카가 내장탕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직원 3’은 정규직 직원이 송별회를 주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독특한 몸짓에 반복적인 음악과 대사는 기괴한 느낌을 주지만, 내용은 극히 일상적이다. 이 같은 부조화는 비정규직 직원 사이에서도 소통이 쉽지 않음을 일깨운다.

2부 ‘에어컨’에선 정규직 직원 남녀 2명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에리카가 해고돼 비정규직 직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상황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비정규직 직원들이 부채를 들고 더위를 쫓는 반면 정규직 여직원은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게 설정돼 있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남자 직원은 여직원의 불평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정치인들이 얼마나 자기 말만 늘어놓는지를 되풀이한다. 이들 역시 기괴한 몸짓과 반복적인 대사로 현대인의 단절성을 드러낸다.

해고된 당사자인 에리카는 3부 ‘고별사’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몸짓은 다른 배우들보다 한층 격정적이고 강렬하다. 그녀는 자기 주변에 모인 직원들 앞에서 고별사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해고와 조금 거리가 있다. “출근길에 고양이에게 잡아먹힌 매미를 봤다”는 것이다. 갈등이 극적으로 타결될지, 아니면 파국으로 치달을지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 에리카는 무심하게 마지막 고별사를 던진다. “고양이가 죽은 매미를 뜯어먹는 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어. 우리 모두 같은 신세가 될 텐데….”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무대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흐르고, 배우들의 정색한 표정과 함께 막을 내린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 88만원 세대의 현실처럼 연극은 관객들에게서 차갑게 등을 돌린다.

연극평론가 노이정씨는 “공연 자체는 단순하지만 많은 부분을 환기시킨다”며 “비극적 상황에서 희극적 면모를 보여주면서 내면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고 평했다. 그는 이어 “음악극 또는 무용극이지만 전통적인 극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오카다 도시키는 “제스처(행동)와 언어의 어긋남은 일상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니냐”며 “연극 무대에서 대사뿐만 아니라 몸짓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