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보다 소통… 치료보다 치유, 환자와 교감하는 의사를 꿈꾸다

의사들의 편지에는 무슨 이야기 있을까 / 김훈, 가오시, 기타야마 오사무 등 지음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엮음 / 태학사

의사들이 처방전을 난수표처럼 갈겨쓰며 폼을 재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문진(問診)을 할 때 시종 무뚝뚝한 표정을 지어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이제 그런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사들은 고압적이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의사들로선 그런 말이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대한 소견을 분명하게 밝혀 주기를 바란다.

소설가 김훈씨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의사가 나의 병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의과대학 교과서에 나오는 병명이라는 개념으로서 이해하지 말고 환자의 고통을 환자의 생명 속에서 발생한 고유한 실존적 현상으로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렇게 받아 주는 것 같지 않았어요. 교과서 속에서 보편화한 개념, 병명으로서 개념화한 일반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요. 저는 의사에게 많은 소외감을 느꼈어요. 의사와 환자의 소통은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했지요.”

이 책은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가 의료 현장의 소통 문제를 짚기 위해 ‘편지로 만나는 의사와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2년 전에 주최한 국제 심포지엄의 내용을 발전시켜 집필한 글들을 담고 있다. 소설가 김훈씨를 비롯해 국내 의학자, 역사학자들이 중국·일본 학자들과 함께 집필자로 참여해 소통에 대한 시각을 깊고 넓게 제공한다.

책의 1부에서 정도언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현대의료의 특성상 문진 때 의사와 환자 간의 면대면(面對面) 대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첨단 기기를 통해 진단하면서 문진의 중요성이 줄고,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고 진료 내용을 기록하게 되면서 환자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보통신의 발달로 질병에 대한 지식을 환자가 쉽게 공유하고 오진(誤診)에 대한 고소가 급증하면서 의사들은 ‘방어 진료’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정 교수는 그럼에도 “소통의 장애로 인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긴장에 싸인다면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를 돕는 교육과 훈련을 여러 해 동안 받은 사람으로서 환자를 선의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2부는 근현대 동아시아 각국에서 활동한 의사들의 편지와 보고서 등을 통해 의사라는 존재의 실체를 깊게 들여다보고 그들이 기울인 소통의 흔적을 살핀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일했던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 존 헤론 (John W. Heron) 등 미국인 의료선교사들이 본국 선교본부와 주고받은 편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알렌은 당시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조선의 현실 여건을 감안해 직접적인 선교 사업을 지양하고 의료 사업에 더 중점을 뒀으나, 헤론은 반대 입장이어서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헤론도 나중엔 섣부른 종교 활동보다는 의료 사업을 통해 조선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선교 활동을 위해 조선에 온 것이지만, 현실 여건을 감안해 조선인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렌은 미국 본국에 보고하기에 앞서 중국 해관(海關)의 미국인 담당자에게 의학 보고서를 보냈다. 가오시(高晞) 중국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 보고서를 분석, 알렌이 조선인의 음식 및 약물, 생활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며 당시 조선인 환자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노력을 살폈다. 이에 따르면 알렌은 “조선인들의 성병이 기생들에 의해 퍼져 간다”고 봤으며, “조선인의 약물 복용은 대체로 중국인과 같지만 인삼은 조선인만의 만병통치약”이라고 기록했다.

기타야마 오사무(北山修) 일본 규슈(九州)대 의대 겸임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세계적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일본의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소개한다. 여기서 20세기 초 일본의 정신분석학계와 임상심리학계의 갈등이 나타나며, 자신의 진심을 숨기는 일본인의 이중성과 그것을 밖으로 표출시키려는 정신분석학의 괴리가 드러난다. 이와 같은 내부적 갈등 양상에도 외부 세계와 학문적으로 소통하려고 한 일본 의학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 책의 마지막은 권이혁 전 서울대병원장(전 서울대총장·문교부 장관)과 닐 골트(N L Gault Jr) 전 미국 미네소타의대 교수의 우정 어린 편지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왕준 관동대 의대 명지병원 이시장이 소개한 글에 따르면 골트는 1954년 서울대와 미네소타대 사이에 맺어진 상호기술협조협정, 즉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총괄 자문관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당시 서울대 의대학장 비서였던 권이혁은 골트와 이때부터 교분을 쌓아 50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눴다. 한국에 현대의학을 보급한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계기로 이뤄진 두 사람의 편지 소통은 골트가 죽는 날까지 이어져 우리 의학이 발전하는 데 소중한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