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나가수’ 원조 임희숙 “임재범은 내 증손자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낮고 굵은 목소리와 짧은 말은 임희숙의 화통한 성격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인터뷰 중간에 유명 솔(soul) 음악을 한구절씩 들려주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그는 울음을 참는 데 익숙해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직업상 쏟아내야 했던 물음에 그는 가끔 말을 더듬거리거나 말끝을 흐렸다. 참기 힘들다 싶으면 생수를 찾았고, 화장실도 들락거렸다. 잘 알려졌다시피, ‘영혼을 노래하는 보컬리스트’ 임희숙(61)은 삶 자체가 굴곡의 연속이었다. 8세 때 남의 집에서 중노동을 하고, 10세 땐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세계 3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인 빌리 홀리데이의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삶은 불행과 고통, 아픔과 좌절의 나날이었다. 두번의 결혼 실패와 대마초 사건, 방송 활동 중단에 이어 척추 수술까지 그는 자신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의 순간’을 맛봐야 했다.

지난 5월30일 찾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그의 아파트 내부는 빈티지 물결로 넘실거렸다. 가구며 의자며 식탁이며 장식품이 장인의 숨결로 이뤄진 ‘작품’까진 아니어도, 이탈리아 어느 고가구 골목을 연상시킬 만큼 제법 멋스러움을 풍겼다.

“제가 50년 전에 골동품이 많이 몰려 있는 인사동 근처에 살아서 옛것과 많이 친숙한 편이에요. 역시 입지 조건과 환경은 무시할 수 없나봐요. 근처엔 음악감상실이나 서점도 굉장히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매일 감상실에서 음악 신청하고 듣는 게 일이었죠.”

임희숙은 1950년 6월29일 태어났다. 전쟁 발발 4일 후에 태어난 것부터 ‘고통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6·25동란(動亂)에 납북됐고, 할아버지는 놀란 가슴으로 돌아가셨다. 언니는 먹을 게 없어 굶어죽었다. 어머니는 재가(再嫁)해 두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로 유명한 이민용 감독이 임희숙의 동생이다.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처럼 가계 정리가 일단 필요해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는 악기 5개를 자유자재로 다룬 뛰어난 뮤지션이었어요. 어떤 면에선 한량이라고 해야겠죠. 꽤 부유해서 집엔 드럼 세트가 있었어요. 아코디언과 트럼펫, 드럼, 하모니카, 기타 연주를 아주 잘했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말 그대로 가수였어요. 악극단 오디션을 통과할 정도로 노래를 잘했는데, 친구가 가족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가수의 길을 포기해야 했어요.”

―어머니는 2009년 뇌출혈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날(돌아가시던 날)도 샬롬대학에서 종강 기념으로 노래를 했는데, 마치고 나서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병원에 실려갔는데, 벌써 몸에 피가 거의 말라가고 있었어요. 이런 분이 아침 차려놓고, 대중교통 이용해 교회에 가서 노래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조종순이라는 이름처럼 (종처럼) 강하고 순박했어요. 어머니는 집에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을 정도로 지극 정성을 다하시는 성격이었어요. 따뜻한 밥 차려주고 차비 한푼이라도 건네줘야 속이 편한 사람이었죠.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바뀌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어머니는 종로 삼일빌딩 앞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했다. 그가 어릴 때 기억하는 어머니에 대한 단상은 술을 팔아 자신을 키운다는 것과 재혼으로 임씨 집안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는 것, 외갓집에서 쫓겨나야 했다는 것 등 대부분 슬픔의 흔적들이었다. 그나마 웃음짓게 만든 유일한 기억은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뿐. 그는 “‘진도아리랑’을 얼마나 화통하게 불렀는지, 귀가 쩌릿했을 정도였고 성량도 엄청 컸다”고 했다. 그가 대화할 때나 노래를 부를 때, 엄청난 성량으로 듣는 이의 기를 죽이는 배경이 조금 이해되기도 했다.

―양아들이 두명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런 면에선 어머니를 쏙 빼닮았어요. 제 친구 부부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남겨진 아들을 제가 받아들였죠. 또 한 명은 제 매니저였는데, 어렵고 불쌍해서 거뒀고요. 이제 모두 ‘출가’시켰어요. 지금은 사업에 실패한 사촌동생이 갈 곳이 없어 저와 함께 살아요.”

―두 번의 결혼이 모두 실패로 끝났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엄청난 집안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 감당할 힘이 부족했어요. 첫번째는 순정적으로, 두번째는 연민으로 결혼했는데, 이혼을 하고 나서 결혼이란 두 사람의 굉장한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그래서 아이도 낳지 않았나요?

“어머니가 임씨와 이씨 자식들 사이에서 죄의식을 많이 느끼고 살았어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뭐가 불만인지 그냥 막 대할 때가 많았어요. 안하무인격으로 저밖에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죠. 제 불편한 결혼생활에서 저 같은 아이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의 행복권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애써 애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죠. 전 집안에서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본 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노래할 때를 제외하곤 말이에요.”

어린 시절의 불행은 그의 음악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타고난 성량도 그랬지만, 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긁는 독창적인 창법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 대중음악의 여러 장르 중에서 그가 유독 솔(soul)과 가스펠(gospel)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폐부를 찌를 만큼 강한 전달력을 지닌, 가난과 소외가 낳은 이 음악의 본성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진정 난 몰랐네’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등 임희숙을 ‘한국 여성 솔의 대모’로 등극시킨 곡들이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 ‘나만의 곡’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가 보여준 가슴 시린 창법과 해석 덕분이었다.

―16세에 솔을 배우며 데뷔했는데,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자주 들락거리던 음악감상실에서 ‘솔의 대부’ 샘 쿡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즐겨 들었어요. 마이클 잭슨이나 머라이어 캐리 모두 이 가수의 음악을 리메이크할 정도로 음악의 뿌리를 지닌 가수예요. 이 가수에게는 재즈는 물론이고 포크, 팝, 펑키, 레게 등 모든 장르가 다 들어 있죠. 샘 쿡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위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는 점인데, 광부나 죄수 같은 약자들이 그의 음악의 주인공이었어요. 아무리 흥겨운 노래라도 듣다보면 괜히 슬퍼져요. 그제서야 알았죠. 솔 음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선생님의 노래를 듣다보면 빌리 홀리데이와 아레사 프랭클린의 창법이 두루 섞여 있는 듯합니다.

“아이고, 마하리아 잭슨이 빠졌어요. 하하. 그는 낮은 음이든 높은 음이든 어떤 음에서도 감동을 주는 영혼의 소리를 지녔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가난한 소리로 점철된 빌리와 탄력 있는 아레사, 영혼의 마하리아가 조금씩 제 목소리에 녹아든 것 같아요.”

임희숙과 임재범은 서로 친척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임재범의 아버지 임택근씨가 임희숙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니, 임재범에게 그는 증조할머니뻘인 셈. 만약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지 않고 4번째 경연에 합류했다면, 그는 선곡으로 증조할머니의 명곡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진한 솔의 향기를 배어 물고 듣는 이를 울리는 곡으로 이만한 선곡이 또 있을까.

―임재범의 출연분을 보셨나요?

“물론 봤죠. 뭐라고 할까. 비었지만 가득 찬 소리라고 할까. 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익사이팅한 소리가 나오는 건 결국 자신이 살아온 모든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가난, 악화된 건강 등 그의 열악한 환경이 모두 합쳐진 소리죠. 제가 데뷔할 당시에도 KBS의 ‘나가수’ 비슷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이달의 가수’를 뽑았는데, 제가 1등 한 기억이 있거든요. 지금 ‘나가수’에서 나오라고 하면 못 나갈 것 같아요. 건강 추스려야 하니까요.”

―‘나가수’의 원조격 가수로 ‘나가수’ 출연 가수들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레코딩은 평생 듣는 거니까, 질리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 모자란 듯 불러야 해요. 하지만 라이브는 리얼리티가 생명이잖아요. 그러니 처음 연습한대로, 악보가 주문하는 형식에 맞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예요. 라이브를 할 때 쉽게 간과하는 것이 ‘노래질’(습관대로 부르려는 안일한 방식)에 길들여지는 일인데, 처음의 그 순수성을 잃지 않고 떨림과 긴장감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도 ‘임희숙 음반’을 음원으로 소비하지 않고, 소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 나이 먹어가면서 비싼 가수가 된 느낌이에요. 하하. 제가 음악적으로 이론이 밝다든가 노래를 잘한다는 평가는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다만 솔 필(feel)이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예전만큼 잘 부르지 못해도 어떤 서러운 목소리, 아픈 목소리, 인생살이가 담긴 목소리라는 저만의 특징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가수의 진정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진정한 가수란 한 사람을 두고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해요. 또 가수는 여유로우면 안돼요. 가난할수록 좋죠.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느끼는 모든 걸 다 가슴에 안고 노래해야 듣는 이를 감동시킬 수 있어요. 가장 아프고 상황이 안 좋을 때 나오는 음악이 솔과 재즈인데, 제가 그런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고마워하고 행복해하고 있어요.”

임희숙은 인터뷰가 끝난 뒤 지방에 행사가 있다며 급히 일어났다. 아픈 허리를 잡고 가까스로 일어나는 그를 부축하려고 하자, 그는 “괜찮다”며 다친 얘기를 슬며시 꺼냈다. “5년 전 호주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넘어져 척추를 다쳤어요. 견딜 수 있겠다 싶어 계속 참아왔는데, 지난 3월 갑자기 마비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 척추 4, 5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어요.”

그는 이 작지 않은 수술 얘기를 꺼내면서도 마치 예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로 손사래를 쳤다. 듣는 이는 깜짝 놀라고 있는데, 말하는 이는 듣는 이의 놀란 표정을 누그러뜨리려고 되레 애쓰고 있었다.

김고금평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