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죽지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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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4.0 / 아나톨 칼레츠키 지음, 위선주 옮김/컬처앤스토리

“오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기존의 시장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8·15 경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하면서 시장 경제의 새로운 모델로 ‘공생 발전’을 제시하고, 그 중요한 전략으로 ‘동반 성장’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정부 안팎에서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진화론, 즉 ‘자본주의 4.0’ 개념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우리 사회에 ‘따뜻한 자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자본주의 4.0’ 개념은 영국의 경제평론가 아나톨 칼레츠키가 펴낸 저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0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돼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칼레츠키의 책이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위기 때마다 전환 … 4번째 시점”=‘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스’, ‘타임스’ 등에 40여년 동안 경제 기사와 칼럼을 써 온 칼레츠키는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에 흔들리는 세계 경제를 보며 자본주의 시스템에 큰 변혁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 변혁이 네 번째 버전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4.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레츠키는 세계경제에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자본주의가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음에도 이를 극복하며 진화해 왔다는 낙관주의를 피력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1.0은 미국·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돼 미국의 대공황과 함께 막을 내린 전통적인 자유방임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2.0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영국과 유럽의 복지국가 개념을 포괄하는 정부 주도의 수정자본주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위기가 발생한 후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자유시장 혁명으로 탄생한 것이 자본주의 3.0, 신자유주의다.

1980년대 초의 대처-레이건 혁명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재발견이라고 널리 칭송받았다. 이후 극단적으로 시장을 이상화하고 정부의 개입을 불신하면서 금융 주도의 시장근본주의, 즉 ‘자본주의 3.3’이 나타났다. 정부를 불신하는 것을 넘어서 규제를 조롱하는 반정부 이데올로기가 미국의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고 칼레츠키는 단언한다. 시장근본주의 사고에 지배되고 있던 부시 행정부가 금융시장의 혼란을 방치하고 개입을 늦추는 바람에 위기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겪으면서 정치와 경제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시장근본주의의 이론적 가정은 파산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환이 시작됐다는 것이 칼레츠키의 주장이다.

◆“정부와 민간 부문이 모두 중요한 역할”= 4.0의 시대에도 이전의 자본주의 전환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와 경제, 정부와 시장의 관계가 다시 정의된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이런 오류가 거의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

정부와 민간은 치명적 오류를 줄이기 위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호 견제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정부의 역할과 영향력은 커지지만 정부의 크기는 줄어야 한다. 관료주의적인 거대정부로는 사회의 변화하는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4.0 시대의 경제이론과 정책은 세계가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칼레츠키는 “4.0 시대에 정부와 시장이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정치인들이 타락하고 은행가들은 탐욕스럽고 기업인들은 무능하고 유권자들은 멍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리기에는 세계가 너무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칼레츠키는 4.0의 특징을 ‘적응성 혼합경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혼합 경제이며,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경제규칙들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적응성 경제이다.

◆“한국의 ‘따뜻한 자본주의’ 4.0”= 칼레츠키는 금융위기를 거치며 미국의 경제정책이 해외 부채와 무역 적자를 줄이는 쪽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미국 시장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은 불가피하게 더뎌지며, 이런 국가 간의 무역갈등도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내수 시장을 중시하는 성장 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한국 경제도 영향을 받게 된다.

칼레츠키는 책에서 중국의 국가주의 경제가 서구 자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가 설파한 진화 과정의 단계를 밟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자본주의 1.0은 비록 제대로 구현되지는 못했으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표방했고, 2.0에서는 강한 정부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정치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3.0은 시장 경제의 기반을 닦으며 세계에 ‘경제 한국’의 위상을 높였으나 글로벌 금융 위기에 연동돼 흔들리고, 내부적으로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했다.

한국자본주의의 4.0은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외피를 입으며 상생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지구촌 생태계를 위한 녹색 성장,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 복지 사각지대 해소 등이 실천 세목이다. 이처럼 ‘공생 발전’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 역시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원리에 사회적 연대 의식을 어떻게 접합시킬 수 있을지가 한국자본주의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