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벗·가장 ‘3色’ 정약용

다산의 재발견 /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들이 근년에 많이 나왔다. 식상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에 눈길이 간 것은, 뛰어난 인문학 저술로 유명한 저자가 ‘재발견’을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5년 동안 발품을 팔아서 찾아낸 다산의 친필 편지 150여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들은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즉 그가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에 제자와 벗, 자녀에게 써 줬던 것들이다.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 ‘견월첩(見月帖)’, ‘백운첩(白雲帖)’, ‘매옥서궤(梅屋書)’,‘만일암지(挽日菴志)’ 등이 세목이다.

저자는 다산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는 편지를 개인적 맥락뿐만 아니라 시대 상황과 맞물린 역사, 문화적 흐름 속에서 살펴봤다. 그것을 통해 정제된 글만을 모아놓은 문집 등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뜨거운 인간’으로서의 다산의 면모를 재구성했다. 특히 유배지에서 탁월한 제자들을 배출하며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이끌었던 교육법의 비밀을 오늘의 언어로 소개했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 상당량을 자료 수집 과정에 할애한다. “다산 친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정리해서 번역하고, 논문으로 썼다. 손에 못 넣으면 안절부절 몸이 달았다. 곁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혀를 찼다. 도도하던 사람이 자료 앞에선 왜 그렇게 속도 없이 비굴해지느냐고, 보기 민망하다고 나무랐다. 그런 소리를 들은 다음 날도 친필 편지 한 장이 나왔다는 소식에 하던 일 비켜두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저자가 다산의 친필 편지를 찾아내서 연구하는 과정이 마치 소설의 장면들처럼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는 자신의 노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비쳐질 수 있으나, 인문학 연구의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유익한 기록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산의 유배기는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계에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다산은 이 기간에 500권에 달하는 저술을 완성했고, 훗날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했다.

다산의 교학 방식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체계적이다. 그것은 여섯 단계, 즉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다산은 단계와 수준에 따라 효과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제자의 개성을 고려하여 전공을 정해줬다. 과거 공부를 할 제자와 시문(詩文)에 힘써야 할 재목을 구분했다.

또 성격이나 신분을 따져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부단한 실전 연습 과정에서 작은 성취도 칭찬했으나 태만은 매섭게 꾸짖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 황상(黃裳)이 결혼 후 학문을 게을리하자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나무랐을 정도다.

다산은 토론을 통해서 문제의식을 예각화했으며,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집체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완수해 냈다. 다산은 저술 작업의 원동력을 제자를 통해 얻었고, 제자들은 스승의 방법론과 작업 과정에 동참하면서 노하우를 익혔다.

이 책은 다산의 제자들 중 황상에 관한 이야기를 특별히 비중있게 담았다. ‘다산여황상서간첩’의 주인공인 황상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가야산 백적동에 은거하며 다산초당(茶山艸堂)과 같은 원림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일궈냈다. 다산은 황상을 그리워한 나머지 자신에게 소식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할 정도였다. 황상은 다산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찾아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이후에 스승의 자제인 정학연 형제와 평생 의지하며 살았다.

다산의 편지는 그가 불가의 승려들과 폭넓게 사귀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다산은 혜장, 은봉, 호의 등 당대에 이름이 높았던 승려들과 벗으로서, 또 스승으로서 교유했다. 그가 승려들에게 써 준 글을 보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위대한 학자이면서도 범부처럼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다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매조도(梅鳥圖)’ 두 폭에 대한 설명은 애틋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유배 생활이 10년째 되는 1810년 다산은 아내로부터 붉은빛이 나는 치마를 받는다. 다산은 다 해진 천에 멋진 글을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내가 그것을 알고 낡은 치마를 보낸 것이다. 다산은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새가 두 마리 들어가 있는 매조도 한 폭을 그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새가 한 마리만 있는 매조도를 또 그리고, 누구를 위한 그림인지를 모호하게 암시만 해놨다. 저자는 이것이 다산이 초당 생활 중에 얻은 소실에게서 낳은 딸 홍임(弘任)을 위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산의 딸이라고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그 처지를 가엾게 여긴 마음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